크리스마스에 눈이 내리면-3

제3화. 엇갈린 시선

by 지그프리드

- 서문 -

따뜻한 커피 향과 복잡 미묘한 감정이 얽히는 카페 안단테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입니다.


○ 등장인물

- 민준(23살) : 명문대를 휴학하고 군 전역 후, 복학 전까지 아르바이트를 하는 남자 주인공,

눈치는 없지만, 다정한 성격

- 서윤(23살) : 카페 안단테 사장의 딸, 털털하고 까탈스러운 성격. 민준이와 동갑

- 하윤(18살) : 비밀을 간직한 조용하고 신비스러운 소녀

- 점장 : 카페 안단테 사장의 처남, 카페의 경영을 맡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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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엇갈린 시선


오랜만에 카페 마감을 하고, 다 같이 저녁을 먹었다.


"야, 강민준. 너 오늘 고생 많았어... 손님이 많았는데 말이야. "


점장님이 호탕하게 웃으며 민준의 술잔을 채웠다.

평소엔 엄격한 고용주였지만, 오늘만큼은 든든한 형처럼 민준의 어깨를 툭 쳤다.

민준은 쑥스러운 듯 뒷머리를 긁적이며 잔을 비웠다.


"하윤 씨가... 저 보다 더 고생했죠."


그 말에 옆에 앉아 있던 하은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녀의 앞에는 도수가 낮은 과일주 한 잔이 놓여 있었지만,

술이 약한 탓인지 이미 뺨은 잘 익은 복숭아처럼 발그레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하윤은 풀린 눈으로 민준의 옆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민준의 시선은 자꾸만 옆자리에서 술 한 잔에 얼굴이 빨갛게 익어버린 하윤에게 향했다.

하윤은 술이 정말 약한지, 아까부터 젓가락질도 제대로 못 하고 눈을 깜빡거리고 있었다.


"하윤 씨, 괜찮아요? 너무 무리해서 마시지 마요."


민준이 걱정스레 묻자, 하윤이 배시시 웃으며 민준을 올려다보았다.

"헤헤... 선배님, 저 괜찮아요. 근데... 세상이 막 빙글빙글 돌아요.

선배님은... 원래 그렇게 다정해요? 아니면 저한테만..."


하은의 혀 꼬인 질문에 테이블 위로 묘한 정적이 흘렀다.

서윤은 젓가락질을 멈추고 하은을 쏘아보았다.

'얘가 취하니까 본색이 나오네' 싶은 마음과 동시에, 가슴 한구석이 따끔거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서윤은 맥주 캔을 찌그러뜨릴 듯 꽉 쥐었다.

'하윤'이라는 이름이 민준의 입에서 다정하게 불릴 때마다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더운 여름 날씨 탓인지, 아니면 눈앞의 풍경 탓인지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에이, 하윤 씨 많이 취했네. 민준이 얘, 원래 오지랖 넓은 곰탱이예요. 착각하면 안 돼."


서윤이 애써 농담처럼 말을 던지며 민준의 잔에 술을 더 따랐다.

하지만 하은은 서윤의 말은 들리지 않는 듯, 점점 민준 쪽으로 몸이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저는요... 태어나서 제 편 들어준 사람... 선배님이 처음이었단 말이에요..."


하은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더니, 결국 툭— 하고 그녀의 머리가 민준의 넓은 어깨 위로 떨어졌다.

민준은 당황해서 몸이 굳어버렸다.


"하, 하은 씨? 정신 차려봐요. 여기서 자면 안 되는데..."


하지만 하은은 민준의 옷소매를 고양이처럼 꼭 쥔 채,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깊은숨을 내뱉었다.

민준의 어깨를 적시는 그녀의 뜨거운 숨결이 테이블 맞은편에 앉은 서윤에게까지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서윤은 그 광경을 보며 입안이 써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민준의 옆자리를 지켜온 시간이.

하지만 자신은 단 한 번도 저렇게 무방비하게, 혹은 저렇게 당당하게 그의 어깨를 빌려본 적이 없었다.

'친구'라는 이름표가 주는 무게 때문에, 혹시라도 그가 멀어질까 봐 항상 적당한 '각도'를 유지해 왔던 그녀였다.

게다가 심연에 가라앉아 있던 감정들이 하윤으로 인해 수면 위로 올라옴을 느꼈다.

그런데 굴러들어 온 저 소녀는, 단 한 달 만에 자신이 넘지 못한 그 선을 너무나 쉽게 넘고 있었다.


"야, 강민준. 하윤 씨 불편해 보이잖아. 이쪽으로 눕혀."


서윤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며 하윤을 떼어놓으려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순간, 잠결인지 진심인지 하은이 민준의 팔을 더 꽉 껴안으며 중얼거렸다.


"가지 마세요... 나 혼자 두지 마..."


민준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는 서윤의 손길을 조심스럽게 피하며, 자신의 코트를 벗어 하윤의 어깨 위에 덮어주었다.


"서윤아, 그냥 좀 두자. 많이 힘들었나 봐. "


민준의 목소리는 한없이 낮고 다정했다.

서윤은 뻗었던 손을 허공에서 거두었다.

화가 나야 하는데, 이상하게 눈물이 먼저 차올랐다.

낯선 감정이었다.

질투라고 하기엔 너무 비참하고, 슬픔이라고 하기엔 너무 뜨거운 무언가가 그녀의 가슴을 난도질하고 있었다.


"그래, 좋을 대로 해."


서윤은 남은 술을 단숨에 들이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에는 어느새 찬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유리창 너머로 민준과 하윤의 모습을 보면서 왠지 모를 슬픔이 묻어났다.


식사자리가 파한 후, 점장님은 사모님이 왜 안오냐는 성화에 못이겨 집으로 가셨고,

민준과 서윤은 취해버린 하윤을 데리고 서윤의 집으로 가고 있었다.

서윤은 민준의 넓은 등과 그 위에 매달린 하윤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사실 민준과 알고 지낸 지는 이제 겨우 두 달이었다.

점장님이 "성실한 친구 하나 구했다"며 민준을 소개했던 초여름의 그날이 떠올랐다.

지방대를 나와 군대를 다녀온 후, 복학 준비를 하고있다고 했다.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묵묵히 돕던 민준에게 서윤이 호감을 느끼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서윤은 자신이 민준과 공유한 '2개월'이라는 시간이 꽤나 밀도 높다고 믿어왔다.

함께 가게 인테리어를 고민하고, 메뉴판을 고치고, 땀 흘리며 오픈을 준비했던 그 짧고도 강렬했던 여름날들. 그녀는 그 시간 동안 민준과 특별한 유대감이 쌓였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오늘, 하윤이 등장한 지 불과 며칠도 안 되어 민준의 등이 하윤에게 내어지는 것을 보며 서윤은 처절한 깨달음을 얻었다.


'우리가 함께한 두 달이, 저 아이가 흘린 눈물 한 방울보다 가벼웠던 걸까.'


서윤에게 그 두 달은 매일이 설렘이자 시작이었지만, 민준에게 그것은 그저 '새로운 직장에서의 적응기'였을 뿐일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밀려왔다. 몇년이라는 긴 세월이 주는 '당연함'조차 없는 사이이기에,

민준이 하윤에게 마음을 줘버리면 자신과 민준의 짧은 인연은 이 여름이 지나기도 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만 같았다.

가로등 불빛 아래, 하윤을 고쳐 업으며 다정하게 웃는 민준의 옆모습은 서윤이 두 달 동안 한 번도 보지 못한 낯선 얼굴이었다. 서윤은 이제야 깨달았다.

자신이 민준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그의 성실함, 그리고 여름 셔츠 위로 드러난 단단한 팔 근육뿐이었다는 것을.

민준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슬픔과 다정함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

2개월 차 동료인 서윤은 아직 물어볼 자격조차 얻지 못한 이방인이었다.


이러나 저러나 서윤에게는 괴로운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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