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민준의 비밀
- 서문 -
따뜻한 커피 향과 복잡 미묘한 감정이 얽히는 카페 안단테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입니다.
○ 등장인물
- 민준(23살) : 명문대를 휴학하고 군 전역 후, 복학 전까지 아르바이트를 하는 남자 주인공,
눈치는 없지만, 다정한 성격
- 서윤(23살) : 카페 안단테 사장의 딸, 털털하고 까탈스러운 성격. 민준이와 동갑
- 하윤(18살) : 비밀을 간직한 조용하고 신비스러운 소녀
- 점장 : 카페 안단테 사장의 처남, 카페의 경영을 맡고 있음
********************************
제4화. 민준의 비밀
사건은 무더운 여름 오후, 민준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그의 가방이 쏟아지며 시작되었다.
바닥으로 떨어진 건 지방대 교재가 아닌, 한국대학교 로고가 선명한 두꺼운 전공 서적과 장학금 신청서였다.
서윤은 흩어진 서류들을 줍다가 얼어붙었다.
신청서 옆에 놓인 민준의 학생증엔 '한국대학교'라는 글자가 선명했기 때문이었다.
2개월 동안 "지방에서 올라와 공무원 준비한다"며 수줍게 웃던 민준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서윤은 그동안 민준에게 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민준아, 지방대 나와도 요즘은 블라인드 채용이라 괜찮아!",
"힘들면 내가 과외 자리 알아봐 줄까?"라며 나름대로 배려한다고 던졌던 말들이 오히려 민준에게는 얼마나 큰 부담이었을지 깨닫자 얼굴이 화끈거렸다.
서윤은 그가 왜 굳이 학벌을 속였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동정이 아닌, 평범한 한 사람으로서의 땀방울을 인정받고 싶었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한편, 하윤은 민준의 명문대 학벌에 놀라기보다 그의 거친 손등에 주목했다.
부유한 집안에서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하윤에게, 스스로의 힘으로 명문대를 일구고 다시 학비를 벌기 위해 앞치마를 두른 민준의 손은 세상에서 가장 존경스러운 대상이었다.
"선배님, 명문대생이라서가 아니라... 이렇게 열심히 사는 모습이 정말 빛나 보여요.
저한테 가르쳐주신 커피 향보다, 선배님이 보낸 시간이 더 진한 것 같아요."
하윤의 이 말은 민준의 열등감 섞인 비밀을 가장 따뜻하게 감싸 안았다.
멋쩍은 표정을 짓던 민준이 말했다.
"나참... 이거... 번거롭게 됐네... 속이려고 했던 건 아니고.... 굳이 한국대를 다닌다고 말하는 게 좀 웃겨서.... 얼떨결에 거짓말을 하게 됐네... 헤헤"
하지만, 서윤은 섭섭한 마음을 감출래야 감출 수가 없었다.
아니... 지가 나하고 지내온 세월이 얼마인데... 속일 수가 있느냔 말이다.
뭐... 지나온 세월이라 해도 2개월 밖에는 안 됐으나.... 괘씸해서 죽을 맛이었다.
민준의 얼굴을 볼 때마다... 심술이 나고 얄미웠다.
그런 서윤의 눈과 마주쳤을 때 민준은 섬뜩함(?)을 느꼈다.
카페 마감 후, 민준은 편의점 의자에 앉아 캔커피 하나를 따며 서윤에게 털어놓았다.
"미안해, 서윤아. 속이려고 한 건 아냐. 그냥... 명문대생 강민준 말고,
여기서 열심히 일하는 아르바이트생 강민준으로 남고 싶었어. 공부할 돈이 없어서 아르바이트하는 게 부끄러운 건 아닌데, 설명하기가 참 구차하더라고."
서윤은 민준의 옆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2개월간 알아온 그가 훨씬 더 단단하고 깊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으며, 그녀의 짝사랑은 더 짙은 색으로 물들었다.
"바보야, 그게 왜 구차해. 난 네가 한국대를 나왔든 어디를 나왔든 상관없어.
네가 매일 아침 제일 먼저 나와서 기계를 닦고, 손님들한테 진심으로 인사하는 그 모습이 좋았던 거야."
그때, 저 멀리서 퇴근하던 하윤이 두 사람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하윤은 자연스럽게 민준의 옆자리에 앉으며 그의 캔커피를 뺏어 한 모금 마셨다.
"선배님, 내일은 제가 일찍 나올게요. 선배님은 학교 도서관 가서 공부 좀 하세요. 장학금 받아야죠!"
하윤의 해맑은 응원에 민준이 웃음을 터뜨렸다.
여름밤의 열기 속에서, 민준의 비밀은 더 이상 무거운 짐이 아닌 세 사람을 이어주는 새로운 연결고리가 되었다.
하지만 서윤은 하윤의 거침없는 다가감이 여전히 가슴 한편을 서늘하게 만드는 것을 느꼈다.
축제 열기로 가득한 캠퍼스는 젊음과 함성으로 가득했다.
민준은 평소의 앞치마 대신 가벼운 반팔 셔츠 차림이었지만, 하윤과 서윤 사이에서 묘하게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곳은 그가 숨기고 싶었던 '본래의 세계'였으니까요.
주막 거리의 시끌벅적한 음악 소리를 뚫고 지나가던 중,
화려한 조명 아래 앉아있던 한 무리의 남녀가 민준을 발견했다.
"야, 저거 강민준 아냐? 야! 강민준!"
민준의 어깨가 눈에 띄게 굳었다. 다가온 이들은 민준의 대학 동기들이었다.
세련된 옷차림에 고가의 시계를 찬 그들은 민준을 반가워하면서도 묘한 우월감이 섞인 시선으로 훑어내렸다.
"너 휴학하고 연락도 안 되더니 여기서 뭐 해? 설마 진짜로 노가다나 알바 뛰고 있는 거야?"
"야, 과탑 하던 놈이 아깝게 왜 이래. 우리 이번에 대기업 인턴 다 같이 들어가는데, 너도 교수님한테 빌어서 복학해라."
동기들의 배려 없는 말들이 서윤과 하윤의 귀에 날카롭게 박혔다. 민준은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냥, 사정이 좀 있어서 쉬고 있어. 즐겁게 놀아라."
민준이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피하려 할 때, 옆에 있던 하윤이 민준의 팔짱을 꽉 끼며 앞으로 나섰다.
평소의 유약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선배님, 여기서 뭐 하세요? 저희 예약한 곳 늦겠어요."
하윤은 차가운 눈빛으로 민준의 동기들을 쳐다보며 덧붙였다.
"공부만 잘한다고 다 인재는 아니더라고요. 남의 사정도 모르면서 무례하게 구는 분들 보니까,
선배님이 왜 이 학교를 잠시 떠나계시는지 알 것 같네요. 가요, 선배님."
하윤의 당당한 태도에 동기들은 당황하며 입을 다물었다.
민준은 얼떨결에 하윤에게 이끌려 그 자리를 벗어났다.
서윤은 그 과정을 한발 뒤에서 지켜보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윤이 민준을 위해 '악역'을 자처하며 그를 보호하는 동안, 서윤은 민준의 초라해진 모습에 가슴이 아파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하윤이는 저렇게 망설임 없이 민준 편을 들어주는데... 나는 왜 바보처럼 서 있기만 했을까.'
민준이 명문대생이라는 사실을 알고 난 뒤, 서윤은 은연중에 그를 자신보다 '위'에 있는 사람으로 대우하고 있었다.
하지만 하윤은 민준을 그저 '자신이 지켜주고 싶은 다정한 사람'으로만 보고 있었던 것이다.
축제의 하이라이트인 불꽃놀이가 시작되었다.
밤하늘로 솟구친 불꽃이 화려하게 터질 때마다 세 사람의 얼굴이 알록달록하게 빛났다.
민준은 하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하윤 씨, 아까는 고마웠어요. 덕분에 살았네."
하윤은 쑥스러운 듯 민준의 어깨에 머리를 살짝 기대며 속삭였다.
"선배님은 어디에 있든 선배님이에요. 전 그 사람들이 부럽지 않아요. 선배님이 내려준 커피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으니까요."
그 모습을 바라보는 서윤의 마음속에는 화려한 불꽃 대신 쓸쓸한 재만 내려앉았다.
여름밤의 열기 속에서도 서윤의 손끝은 차갑게 식어갔다.
2개월의 시간 동안 쌓아온 우정보다, 고작 몇 주 만에 민준의 상처를 공유하게 된 하윤의 존재감이 더 거대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