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에 눈이 내리면-5

제5화. 축제 속의 도피

by 지그프리드

- 서문 -

따뜻한 커피 향과 복잡 미묘한 감정이 얽히는 카페 안단테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입니다.


○ 등장인물

- 민준(23살) : 명문대를 휴학하고 군 전역 후, 복학 전까지 아르바이트를 하는 남자 주인공,

눈치는 없지만, 다정한 성격

- 서윤(23살) : 카페 안단테 사장의 딸, 털털하고 까탈스러운 성격. 민준이와 동갑

- 하윤(18살) : 비밀을 간직한 조용하고 신비스러운 소녀

- 점장 : 카페 안단테 사장의 처남, 카페의 경영을 맡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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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축제 속의 도피


한참 모 대학교의 축제를 즐기고 있을 때였다.


"저기예요! 저쪽 입구로 들어왔어요!"


하윤의 목소리가 떨렸다. 민준은 본능적으로 하윤과 서윤의 손을 낚아채 무대 뒤 천막 사이로 몸을 숨겼다.

사내들은 지난번 하윤을 처음 만났을 때 보았던 검은 양복 사내들이었다.

수만 명의 인파가 모인 대학교 축제장은 숨기 좋은 장소이기도 했지만, 한 번 들키면 빠져나가기 힘든 덫이기도 했다.


"이대로는 금방 들켜요. 옷부터 갈아입어야 해요!"


서윤이 기지를 발휘했다.

그녀는 근처 과 주막에서 취해 잠든 학생들의 과잠 두 벌을 빌려(사실상 빌린 척 가져오며) 민준과 하윤에게 입혔다.


"자, 이제 둘은 그냥 평범한 CC처럼 보여야 해. 하윤 씨는 모자 깊게 눌러쓰고 민준이 한테 꼭 붙어 있어."


서윤의 지시에 하윤은 민준의 품에 쏙 들어갔고, 민준은 하윤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고개를 숙였다.

서윤은 그들 앞에서 마치 길을 찾는 과 대표처럼 당당하게 걸으며 사내들의 시선을 분산시켰다.


중앙 광장을 가로지르려던 찰나, 사내 한 명과 눈이 마주칠 뻔한 위기가 찾아왔다.


"이쪽이야!"


민준은 급히 근처에서 공연 중이던 댄스 동아리의 대기 줄 안으로 두 여자를 밀어 넣었다.

화려한 무대 의상을 입은 학생들 틈에 섞인 세 사람은 무대 위로 올라가야 하는 위기에 처했지만,

민준은 기지를 발휘해 무대 옆 커다란 스피커 뒤 좁은 공간으로 두 사람을 숨겼다.

좁은 틈새, 세 사람의 숨소리가 거칠게 섞였다.

민준의 등 뒤로 하윤이 바짝 붙어 있었고, 서윤은 민준의 가슴팍 바로 앞에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심장 박동 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모를 만큼 크게 울려 퍼졌다.


"서윤아, 내가 정문 쪽으로 유인할 테니. 네가 하윤 씨 데리고 후문으로 빠져나가."


민준의 낮은 목소리에 서윤은 잠시 멈칫했다.

위험한 미끼 역할을 민준이 한다는 거에 예상치 못한 감정이 올라왔다.


"알았어. 나중에 카페 앞에서 봐!"


민준은 모자를 쓰고 사내들의 시선이 닿는 곳으로 뛰어갔다.

"저기다!"

사내들이 서윤을 쫓아 우르르 몰려가는 사이, 서윤은 하윤을 데리고 어두운 공대 건물 뒷길을 통과해 대기시켜 둔 점장님의 낡은 트럭에 올라탔다.


가까스로 사내들을 따돌리고 카페 '안단테' 앞에 도착했을 때, 서윤은 이미 땀에 흠뻑 젖은 채 숨을 몰아쉬며 기다리고 있었다.


"하아... 하아... 다들 무사해?"


서윤의 물음에 민준이 차에서 내려 그녀에게 다가갔다.

민준은 말없이 서윤의 어깨를 꽉 쥐어주었다.


"고생했다, 서윤아. 네 덕분이야."


그 짧은 칭찬 한마디에 서윤의 서운함은 눈 녹듯 사라졌다.

하지만 차 뒷좌석에서 내린 하윤이 울먹이며 민준의 품으로 달려가 안기는 모습을 보자, 다시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선배님... 저 너무 무서웠어요... 선배님 없었으면 저 정말..."


하윤을 달래주는 민준의 손길은 아까 자신을 격려하던 손길보다 훨씬 더 조심스럽고 애틋해 보였다.

여름밤의 소동은 이렇게 일단락되었지만, 세 사람의 마음속에는 지워지지 않는 긴장감과 미묘한 감정의 앙금이 남았다.


하윤을 진정시키고 자초지종을 서윤이 먼저 물었다.


"하윤 씨. 이젠 우리에게 말해줘요. 저 사람들은 누구죠??? 그리고 왜 쫓기고 있는 거예요?"


망설이던 하윤이 그간의 사정을 말했다.

"그 사람들... 제 아빠가 보낸 사람들이에요. '태성 그룹'의 보안팀이죠."

하윤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서윤은 숨을 들이켰다.

대한민국 재계 서열에 손꼽히는 거대 기업의 이름이었으니....


하윤은 태성 그룹 회장의 막내딸이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집은 안식처가 아닌 정교하게 설계된 감옥이었다.


"저는 태어날 때부터 제가 갈 학교, 만날 친구, 심지어 입을 옷까지 다 정해져 있었어요. 아빠에게 저는 딸이 아니라, 회사의 사업 확장을 위한 '가장 예쁜 장식품'일뿐이었거든요."


하윤이 도망친 결정적인 이유는 정략결혼 때문이었다.

상대는 아버지의 사업 파트너이자 하윤보다 열 살이나 많은, 소문조차 좋지 않은 타 기업의 후계자였다.

하윤은 거부했지만, 아버지는 "그게 네가 태어난 이유다"라며 차갑게 못 박았다.

드라마에서 많이 봐왔던 스토리랄까?

정략결혼이 싫은 공주가 집을 도망쳐 나와서... 역경을 헤치고 뭐.... 그런 얘기????


결혼식 날짜가 잡히던 날 밤, 하윤은 평생 모은 비상금과 신분증만 챙겨 성북동 저택의 담장을 넘었다.

화려한 드레스 대신 하얀 원피스를 입고, 처음으로 혼자 지하철을 타며 도착한 곳이 바로 이 변두리 동네였다.


"처음엔 무서웠어요. 세상 밖은 너무 차갑고 낯설어서... 그런데 민준 선배님이 가르쳐주신 커피 향기가,

제가 살던 성 안의 어떤 향수보다 따뜻했어요. 그래서 여기 더 머물고 싶었어요.

아니, 처음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하윤의 사연을 듣는 민준의 눈빛이 깊게 흔들렸다.

부모를 여의고 학비를 위해 이름표를 숨긴 자신과, 부모의 통제 아래 이름표를 버리고 도망친 하윤.

두 사람은 '진짜 나로 살고 싶다'는 지점에서 완벽하게 맞닿아 있었던 것이다.


"하윤 씨... 그런 줄도 모르고 난..."


서윤은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하윤이 그저 사연 있는 척 연기하는 불여우라고 생각했는데, 그녀가 짊어진 짐은 자신이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무거웠다.

하지만 동시에, 민준이 하윤을 바라보는 그 '깊은 이해'의 눈빛이 서윤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하윤이 고개를 숙이며 눈물을 뚝 떨어뜨렸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선배님도, 서윤 씨도 위험해질 텐데... 이제 제가 떠나는 게 맞겠죠?"


그때 민준이 하윤의 차가운 손위로 자신의 손을 겹쳤다.

아까 007 작전 때 하윤을 보호하던 그 단단한 손길이었다.


"가지 마요. 갈 데도 없으면서 어디로 가려고."


민준은 옆에 앉은 서윤을 바라보았다.


"서윤아, 점장님한테는 내가 잘 말씀드릴게.

하윤 씨, 당분간 내 자취방 근처에 아는 할머니 댁 빈방이 있어. 거기 숨어 지내면서 카페로 출근해.

내가 지킬게."


서윤은 차마 반대할 수 없었다.

민준의 눈빛은 이미 결연했고, 하윤의 가련한 모습은 같은 여자로서 외면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서윤은 입술을 깨물며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지킨대? 카페 주인의 딸인 내가 허락 안 하면 안 되는 거 알지? 일단... 여기 있어.

대신 나 몰래 도망치지 마. 귀찮아지니까."


서윤의 츤데레 같은 대답에 하윤이 처음으로 환하게 웃었다.

여름밤의 열기는 식었지만, 세 사람 사이에는 이제 '비밀'이라는 더 끈적하고 단단한 끈이 생겨버렸다.


"자, 이제부터 카페 '안단테'는 단순한 카페가 아니다. 첩보 기지다."

민준이 진지한 얼굴로 화이트보드에 카페 평면도를 그렸다.

명문대 경영학과 출신답게 브리핑은 꽤나 체계적이었지만, 정작 내용은 귀엽기 그지없었다.


"하윤 씨, 그 화사한 원피스는 당분간 압수야. 재벌가 막내딸 포스가 너무 넘치잖아."


서윤은 하윤에게 자신의 옷장에서 꺼낸 헐렁한 체크 남방과 뿔테 안경, 그리고 커다란 캡 모자를 건넸다.

하윤이 안경을 쓰고 머리를 질질 짠 채 모자를 깊게 눌러쓰자, 서윤은 만족스러운 듯 손가락을 튕겼다.


"좋아. 이제 누가 봐도 시험 기간에 찌든 고시생 같네. 이름도 당분간 '하윤' 말고... 음, '말자' 어때? 구수하고 안 들킬 것 같잖아."

"말... 자요?" 하윤이 당황했지만, 민준은 옆에서 진지하게 "오, 보안성 높은 이름인데?"라며 맞장구를 쳤다.


"만약 검은 양복 입은 사람들이 들어오면, 절대로 이름을 부르면 안 돼. 우리가 정한 메뉴 암호로 소통하자."

민준이 정한 암호는 이랬다.


"아메리카노 진하게 한 잔!"이라고 하면, '수상한 놈 등장, 하윤은 주방 창고로 숨어라.'"여기 휘핑크림 많이요!"라고 하면 '위기 상황, 서윤은 점장님 부르고 난 대치한다.'

"오늘 원두 상태가 좋네요."라고 하면 '상황 종료, 안심해도 됨.'


연습을 위해 서윤이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오며 "아메리카노 진하게!"라고 외치자, 하윤은 화들짝 놀라 서빙하던 쟁반을 들고 주방 구석 보일러실로 다이빙하듯 숨어버렸다.

그 모습을 본 민준과 서윤은 배를 잡고 웃음을 터뜨렸다.


"좋아. 좋아. 아주 좋아. 하하하"


사내들이 카페 이름을 검색해 찾아올 것을 대비해, 입구의 입간판 문구도 바꿨다.


[오늘의 추천: 눈물 젖은 소금 빵] [알바생 구함: 힘세고 눈치 빠른 분 환영]


"이렇게 써 붙여 놓으면 재벌가 아가씨가 있을 법한 곳으론 절대 안 보이겠지?" 서윤의 근거 없는 자신감에 세 사람은 마주 보며 낄낄거렸다.


여름 햇살이 따갑게 내리쬐는 오후, 손님이 뜸한 시간에 세 사람은 카운터 안쪽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민준은 하윤에게 새로 개발한 '위장용 메뉴'인 달고나 라테를 만들어주었다.


"말자 씨, 아니 하윤 씨. 이거 마시고 기운 내요. 우리가 있는 한 절대 못 잡아가게 할 거니까."


민준의 다정한 말에 하윤은 달콤한 크림을 입가에 묻힌 채 배시시 웃었다.


"고마워요, 민준 선배님. 그리고 서윤 씨도요. 저 태어나서 이렇게 스릴 있고 재미있는 건 처음이에요."


서윤은 하윤의 입가에 묻은 크림을 휴지로 툭 닦아주며 츤데레처럼 말했다.

"재미있긴. 나중에 태성 그룹에서 손해 배상 청구하면 네가 다 책임져야 해. 알았어?"


세 사람은 얼음이 가득 찬 유리잔 부딪치는 소리를 배경으로 함께 웃었다.

비록 밖에는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위협이 도사리고 있었지만, 에어컨 바람 시원한 카페 안단테에서 함께 머리를 맞댄 이 순간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단단하고 행복한 요새처럼 느껴졌다.


며칠 후,


카페 안단테 문으로 들어선 사람은 체격이 건장하고, 머리를 짧게 깎은,

그리고 무엇보다 완벽한 검은색 수트를 차려입은 사내였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무거운 표정으로 선글라스를 벗으며 카페 안을 날카롭게 훑었다.


사내와 눈이 마주친 민준의 안색이 변했다.

그는 카운터 밑에서 하윤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하윤 씨, 아니 말자 씨! 아메리카노 진하게 한 잔! 지금 당장!"


민준의 긴박한 외침에 하윤은 조건반사적으로 몸을 날렸다.

그녀는 쟁반을 방패처럼 앞세우고 주방 구석 보일러실로 슬라이딩하듯 숨어들었다.

그 과정에서 "으악!" 하는 작은 비명이 들렸지만 민준은 모른 척하며 카운터를 단단히 붙잡았다.


사내가 카운터로 성큼성큼 다가오자, 서윤은 미리 준비해둔 휘핑크림 스프레이를 손에 꽉 쥐었다.

만약 그가 하윤의 행방을 묻는다면 얼굴에 생크림 폭탄을 투하할 기세였다.


"어이, 거기 총각."


사내가 굵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민준은 마른침을 삼키며 대답했다.


"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저희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아니, 뭘 모른다는 거야. 여기... 휘핑크림 많이 되나?"


서윤은 움찔했다. '휘핑크림 많이'는 위기 상황, 내가 대치할 테니 점장님을 불러라라는 암호였기 때문이다.

서윤은 민준을 향해 눈신호를 보내며 소리쳤다.


"민준아! 들었지? 휘핑크림 많이래! 빨리 점장님 불러! 내가 막고 있을게!"


서윤은 스프레이를 사내의 코앞까지 들이밀며 전투 태세를 갖췄다.

사내는 당황한 듯 뒤로 주춤 물러나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 총각들 왜 이래? 내가 당이 떨어져서 그래, 당이! 오늘 친구 놈 결혼식 갔다가 뷔페 음식이 너무 맛없어서 제대로 못 먹었단 말이야. 카페 모카에 휘핑크림 좀 산처럼 쌓아달라는 게 그렇게 죽을죄인가?"


민준과 서윤은 동시에 얼어붙었다. 사내의 가슴팍에는 '신랑 친구'라고 적힌 작은 꽃장식이 달려 있었고,

그의 손에는 방금 예식장에서 받아온 답례품 세트가 들려 있었다.


"저... 결혼식 하객이세요?" 민준이 허탈하게 물었다.

"그럼 내가 뭐 조폭이라도 되는 줄 알았어? 이 양복, 오늘 입으려고 큰맘 먹고 빌린 거야.

근데 아까부터 주방에서 덜컹거리는 소리는 뭐야? 누구 갇혔어?"


민준은 서둘러 보일러실 문을 열었다. 그 안에서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하윤이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기어 나왔다.


"가... 갔나요? 나쁜 사람들 갔어요?"


하윤의 뿔테 안경은 옆으로 삐뚤어져 있었고, 머리에는 거미줄이 살짝 걸려 있었다.

그 꼴을 본 사내는 혀를 찼다.


"쯧쯧, 요즘 애들 취업 스트레스가 심하다더니... 카페 알바생들이 단체로 첩보 영화를 찍고 있네."


결국 사내는 민준이 정성껏(그리고 미안한 마음에 산처럼) 쌓아 올린 휘핑크림 모카를 마시며 흡족한 표정으로 나갔다.


"오늘 원두 상태가... 아주 좋네요."


서윤이 기운 빠진 목소리로 마지막 암호를 읊조리자, 세 사람은 카운터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하윤 씨, 미안해요. 내가 너무 오버했지?" 민준이 사과하자, 하윤은 삐뚤어진 안경을 고쳐 쓰며 꺄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에요, 선배님. 저 아까 보일러실 안에서 얼마나 긴장했는지 몰라요. 근데 서윤 씨가 휘핑크림 통 들고 싸우려고 할 때 진짜 멋있었어요!"


서윤은 얼굴이 빨개진 채 고개를 돌렸다.


"누가 싸운대? 난 그냥... 휘핑 농도가 잘 나왔나 확인하려고 한 거지."


여름 햇살 아래, 세 사람의 첩보 작전은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서로를 지키겠다는 그 엉뚱하고 진심 어린 마음만은 한층 더 두터워졌다.

하지만 이들의 소동을 카페 밖 멀리서 지켜보는 진짜 '검은 차' 한 대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아직 아무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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