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헤어짐
- 서문 -
따뜻한 커피 향과 복잡 미묘한 감정이 얽히는 카페 안단테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입니다.
○ 등장인물
- 민준(23살) : 명문대를 휴학하고 군 전역 후, 복학 전까지 아르바이트를 하는 남자 주인공,
눈치는 없지만, 다정한 성격
- 서윤(23살) : 카페 안단테 사장의 딸, 털털하고 까탈스러운 성격. 민준이와 동갑
- 하윤(18살) : 비밀을 간직한 조용하고 신비스러운 소녀
- 점장 : 카페 안단테 사장의 처남, 카페의 경영을 맡고 있음
- 보안팀장 : 태성그룹 보안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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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헤어짐
"오늘 저녁은 제가 책임질게요! 맨날 선배님이랑 서윤 씨가 해주는 것만 먹어서 너무 죄송해서요."
하윤의 폭탄선언에 민준과 서윤은 동시에 불안한 눈빛을 교환했다.
'이건 아닌 것 같은데.... 정말로..'
'맞아... 아닌 것 같은데...'
라테 아트 스팀 노즐 소리에도 깜짝 놀라던 하윤이 칼과 불을 잡겠다니,
이건 '요새 작전'보다 더 위험한 상황일지도 몰랐다.
하윤이 도전한 메뉴는 '해물 파스타'였다. 하지만 시작부터 난관이었다.
"선배님, 여기 파스타 면은 왜 이렇게 딱딱해요? 이거... 튀겨야 하나요?"
"하윤 씨, 그건 삶는 거예요. 8분 정도..."
민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윤은 펄펄 끓는 물에 파스타 면을 통째로 투척했다.
그런데 면이 냄비 밖으로 삐져나와 가스 불에 닿으며 치익 소리와 함께 타오르기 시작했다.
"악! 불이야! 선배님, 면에서 불꽃놀이를 해요!"
서윤이 급히 달려와 젖은 행주로 불을 껐다.
서윤은 이마를 짚으며 중얼거렸다.
"하윤 씨, 그냥 앉아 있는 게 도와주는 거예요... 정말로... 요리 같은 건 안 해도 되는데...?"
하윤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번엔 마늘을 다지겠다며 야심 차게 칼을 들었지만, 그녀의 칼질은 마늘을 다지는 게 아니라 마늘을 '타격'하고 있었다.
사방으로 튀어 나가는 마늘 조각들에 민준은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숙여야 했다.
"자, 이제 간을 맞추면 되겠죠?"
하윤은 고급스러운 손놀림으로 소금을 뿌렸다. 문제는 그 양이었다.
'한 꼬집'의 정의를 모르는 하윤은 소금통의 뚜껑이 열린 줄도 모르고 그대로 냄비에 쏟아부었다.
"앗, 조금 많이 들어간 것 같은데... 설탕을 넣으면 중화되겠죠?"
그녀가 투하한 것은 설탕이 아니라 베이킹소다였다.
빵 만들 때 쓰는 베이킹 소다.
순식간에 파스타 소스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보랏빛 거품을 내뿜기 시작했고,
주방은 흡사 연금술사의 실험실처럼 변해버렸다.
결국 카페 안단테의 주방은 밀가루 가루와 보랏빛 거품, 그리고 정체불명의 마늘 냄새로 초토화되었다.
민준과 서윤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연기가 자욱한 주방을 바라보았다.
"저... 죄송해요. 저는 그냥... 맛있는 거 해드리고 싶어서..."
하윤이 울상이 되어 앞치마 끝을 만지작거리자, 민준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하윤 씨, 요리는... 음, 나중에 천천히 배우기로 하죠. 일단 이 거품부터 좀 치울까요?"
결국 그날의 저녁 식사는 민준이 주방을 긴급 복구한 뒤 만든 '하윤이 망친 재료들을 겨우 살려낸 볶음밥'이었다.
세 사람은 주방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앉아 볶음밥을 나눠 먹었다.
하윤의 얼굴에는 검은 그을음이 살짝 묻어 있었고, 서윤은 머리에 밀가루를 뒤집어쓴 채였다.
"근데 이거, 은근히 맛있지 않아요? 제가 넣은 소금이 감칠맛을 낸 것 같은데..."
하윤이 당당하게 말하자 서윤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콧방귀를 뀌었다.
"꿈 깨. 이건 순전히 강민준 심폐소생술 덕분이야. 야, 이하윤. 넌 앞으로 주방 금지야. 알았어?"
서윤의 구박에도 하윤은 깔깔거리며 웃었다.
민준은 두 소녀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서울 명문대에서 경쟁하던 시절의 정찬보다, 주방을 다 태워 먹고 먹는 이 볶음밥이 훨씬 더 달콤하게 느껴졌다.
여름밤, 카페 안단테의 창밖으론 매미 소리가 들려왔고, 주방 구석엔 하윤이 실패한 '보랏빛 파스타'의 잔해가 훈장처럼 남겨져 있었다.
다음날.
이번에 들어온 남자는 이전 하객과는 분위기부터 달랐다.
검은 양복이 아닌 세련된 회색 수트를 입고 있었지만, 감출 수 없는 위압감이 카페 전체를 짓눌렀다.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카운터 앞 창가 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펼쳤다.
"아메리카노... 진하게 한 잔?"
민준은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 남자는 '진짜'라는 것을요. 민준은 카운터 아래로 하윤의 발을 툭 치며 아주 낮은 목소리로 암호를 읊조렸다.
"하윤 씨, 아메리카노 진하게 한 잔... 부탁해요."
하윤은 아까처럼 보일러실로 숨으려 몸을 틀었다.
그때, 자리에 앉아 있던 남자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나직하게 입을 열었습니다.
"숨지 마세요, 하윤양. 보일러실 먼지 많더군."
그 목소리에 하윤의 발걸음이 돌처럼 굳었다.
민준과 서윤의 얼굴도 하얗게 질렸다.
남자는 선글라스를 벗어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날카로운 눈매의 중년 남성, 바로 태성 그룹의 보안팀장 '최 실장'이었다.
서윤은 떨리는 손으로 휘핑크림 스프레이를 움켜쥐었지만, 최 실장은 그런 서윤을 보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 생크림은 커피 위에나 올리시지, 아가씨. 우리 애들이 좀 허술해 보였나 본데, 나는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아니거든."
최 실장은 민준을 똑바로 응시했다.
"강민준 씨. 한국대학교 경영학과 휴학생. 부모님 여의고 고생이 많더군. 자네의 그 성실한 이력서가 참 인상 깊었어. 그런데 지금 자네가 하고 있는 일은 '성실'과는 거리가 좀 멀어 보이는데?"
민준의 사연까지 모조리 파악하고 있는 최 실장의 압박에 서윤은 입술을 깨물었다.
민준은 떨리는 손을 감추며 카운터 앞으로 나섰다.
"무슨 용건이십니까. 영업 방해라면 경찰을..."
"경찰? 하윤 아가씨가 무단 가출 중이라는 신고를 하면 누가 더 곤란해질까?"
최 실장은 여유롭게 지갑에서 빳빳한 수표 한 장을 꺼내 테이블에 놓았다.
"진짜 아메리카노 한 잔 주게. 암호 같은 거 섞지 말고, 아주 정직하게 내린 놈으로."
하윤이 천천히 민준의 뒤에서 걸어 나왔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지만, 빛은 어느 때보다 단단했다.
"최 실장님, 선배님들이랑 서윤 씨는 아무 잘못 없어요. 제가 강요해서 여기 머문 거예요."
"그건 회장님께 직접 말씀하시죠. 차 대기시켜 놨습니다."
최 실장이 일어서려 하자, 민준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아직 주문하신 커피 안 나왔습니다. 손님."
민준의 눈빛에 최 실장이 멈칫했다.
지방대 알바생인 척하던 시절의 순한 눈이 아니었다.
소중한 것을 지키려는, 벼랑 끝에 선 엘리트의 날카로운 투지였다.
결국 최 실장은 민준이 내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커피 맛은 좋군. 하지만 맛있는 커피가 사람의 앞길을 보장해주진 않아."
최 실장은 하윤을 향해 문을 열어주었다.
하윤은 카페를 나서기 전, 민준과 서윤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울음을 참으며 입모양으로만 간신히 속삭였다.
[다.시.돌.아.올.게.요.]
하윤이 검은 차에 올라타고 멀어지는 것을 보며, 서윤은 결국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민준은 하윤이 떠난 빈자리에 남겨진 식어버린 커피잔을 꽉 쥐었다. 그의 손등에 핏줄이 돋았다.
서윤은 막상 하윤이 떠나 버리자, 공허한 마음이 들었다.
같이 있을때는 민준을 향한 하윤의 여우짓(?)에 속이 다 타들어 갔지만, 막상 없으니 서운하기 그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