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에 눈이 내리면-7

제7화. 멈춰버린 시간

by 지그프리드

- 서문 -

따뜻한 커피 향과 복잡 미묘한 감정이 얽히는 카페 안단테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입니다.


○ 등장인물

- 민준(23살) : 명문대를 휴학하고 군 전역 후, 복학 전까지 아르바이트를 하는 남자 주인공,

눈치는 없지만, 다정한 성격

- 서윤(23살) : 카페 안단테 사장의 딸, 털털하고 까탈스러운 성격. 민준이와 동갑

- 하윤(18살) : 비밀을 간직한 조용하고 신비스러운 소녀

- 점장 : 카페 안단테 사장의 처남, 카페의 경영을 맡고 있음

- 보안팀장 : 태성그룹 보안팀장

- 이회장 : 태성그룹 회장, 하윤의 아버지

- 조태오 : 하윤의 약혼남, 여성 편력이 심함, 여자를 보기를 도구로 생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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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멈춰버린 시간


여름 매미 소리는 여전히 극성맞았지만, 카페 내부는 기묘한 정적에 잠겼다.

민준과 서윤은 각자의 위치에서 평소처럼 일을 하고 있었지만, 두 사람 모두 무의식중에 '그녀'의 흔적을 찾고 있었다.


민준은 평소처럼 라테를 만들다 우유 거품을 냈다.


"하윤 씨, 이 소리 잘 들어봐요. 이게 부드러운 거품이 나는 소리..."


민준은 말을 마저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옆에는 가르침을 기다리던 하윤 대신, 차갑게 식은 스테인리스 조리대만이 놓여 있었다.

민준은 허공을 향해 내뱉은 자신의 목소리가 민망한 듯 마른세수를 했다.


'아, 이제 없지.'


그는 명문대 시절의 어떤 난제보다도, 지금 이 텅 빈 옆자리를 견디는 것이 더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윤은 주방 구석 보일러실 문을 열었다가 멍하니 멈춰 섰다.

그곳엔 하윤이 '순덕'이 모드로 숨어 있을 때 묻혀놓은 작은 발자국과,

급하게 숨느라 떨어뜨린 뿔테 안경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야, 이하윤... 너 이거 안 챙겨갔냐. 멍청하게..."


서윤은 안경을 집어 들고 렌즈를 옷소매로 닦아냈다.

맨날 구박만 하고 "주방 금지"라고 소리쳤던 게 가시처럼 목에 걸렸다.

하윤이 망쳐놓았던 보랏빛 파스타의 흔적을 지우던 날, 서윤은 차라리 주방이 다시 엉망이 되어도 좋으니 하윤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듣고 싶다고 생각했다.


마감 시간, 민준과 서윤은 습관적으로 세 잔의 커피를 내렸다.

테이블 위에는 세 개의 잔이 놓였지만, 창가 쪽 하윤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민준아, 하윤이 진짜 괜찮을까? 그 무서운 집으로 다시 돌아갔는데..."


서윤의 물음에 민준은 대답 대신 테이블 위의 학생증을 꽉 쥐었다.

지방대생인 척하며 숨어 지내던 '안단테'에서의 2개월. 하지만 이제 민준은 더 이상 숨지 않기로 했다.


민준이 가방 깊숙이 넣어두었던 두꺼운 경영학 전공 서적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렸다.

그리고 그 옆에 태성 그룹 최 실장이 남기고 간 명함을 놓았다.


"서윤아, 나 공부 다시 시작할 거야. 그리고... 이 명함으로 연락할 거야."

"민준아, 설마..."

"하윤 씨가 그랬잖아. 내가 내린 커피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고. 명문대 졸업장보다 내 진심이 더 위로가 된다고. 그 말을 지키고 싶어. 태성 그룹이라는 성벽이 아무리 높아도, 알바생 강민준이 아니라 '강민준' 그 자체로 가서 하윤 씨 데려올 거야."


민준의 눈빛은 여름밤의 열기보다 더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서윤은 그런 민준의 손위로 자신의 손을 겹쳤다. 이번엔 질투가 아니었다.

셋이 함께했던 그 엉뚱한 '요새 작전'을 진짜로 완성하고 싶은 동료애, 그리고 여전히 민준을 아끼는 그녀만의 사랑이었다.


"나도 도울게. 우리 아빠가 태성 그룹 물류 담당 이사랑 동창이래. 뭐든 캐낼 수 있어."


두 사람은 하윤이 남기고 간 삐뚤어진 안경과 식어버린 커피잔을 바라보며 결심했다.

카페 '안단테'의 여름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진짜 작전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하윤이 떠난 뒤, 민준의 눈빛은 더 이상 순박한 알바생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카페 '안단테'의 창고 한편에 화이트보드를 설치하고, 그동안 덮어두었던 전공 지식과 명문대 인맥을 총동원해 태성 그룹과 하윤의 약혼자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서윤은 민준이 화이트보드에 빼곡히 적어 내려가는 복잡한 가계도와 기업 구조도를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민준은 며칠 밤을 새운 듯 눈이 충혈되어 있었지만, 펜을 쥔 손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태성 그룹 하 회장은 지금 무리한 사업 확장을 위해 대규모 자금이 필요한 상태야.

그래서 하윤 씨를 이용해 '성진 물산'과 전략적 파트너십을 맺으려는 거지.

이건 결혼이 아니라 '자금 수혈'이야."


민준의 분석은 날카로웠다. 그는 태성 그룹의 재무제표와 공시 자료를 분석해, 그들이 현재 겪고 있는 유동성 위기가 하윤의 정략결혼과 직결되어 있음을 찾아냈다.


민준이 가장 집중한 것은 하윤의 약혼자, 성진 물산의 후계자 조태오였다.

대외적으로는 유능한 젊은 경영자로 알려졌지만, 민준이 대학 동기들과 정보원들을 통해 입수한 실체는 추악하기 그지없었다.


"조태오... 이 사람 생각보다 훨씬 위험해."


민준이 던진 파일 속에는 조태오가 강남의 비밀 클럽에서 벌인 문란한 파티 사진들과 가출 청소년들을 상대로 한 부적절한 스캔들이 담겨 있었다.

심지어 마약 의혹까지 제기되었으나, 집안의 힘으로 매번 덮어왔던 전과가 있었다.


"사생활만 문란한 게 아니야. 여성 편력이 심각한 데다, 마음에 안 들면 폭언과 폭행을 일삼는다는 소문이 파다해. 하윤 씨가 이 사람한테 가면... 그건 감옥이 아니라 지옥이 될 거야."


서윤은 조태오의 행적이 적힌 문서를 읽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무리 사업이 중요하다지만, 어떻게 자기 딸을 이런 쓰레기한테 보낼 수가 있어?

민준아, 이건 진짜 막아야 해. 하윤이, 저번에 주방에서 파스타 망치고 해맑게 웃던 걔란 말이야. 걔가 이런 사람 밑에서 시들어가는 건 절대 못 봐."


서윤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질투의 대상이었던 하윤은 이제 반드시 구해야 할 동료이자 지켜줘야 할 동생이 되어 있었다.


민준은 조태오의 사진을 화이트보드 정중앙에 붙이며 펜을 내려놓았다.


"서윤아, 나 이 정보들 가지고 태성 그룹 하 회장 직접 만나러 갈 거야."

"민준아, 미쳤어? 그 사람들이 너를 만나줄 것 같아? 그냥 알바생이라고 무시하고 쫓아낼 텐데!"

"그래서 준비한 게 있어."


민준은 가방에서 정갈하게 인쇄된 보고서 하나를 꺼냈다.

표지에는 [태성 그룹 재무 구조 개선 및 리스크 관리 전략 제안서]라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오랫동안 구석에 박혀있던, 먼지 묻은 한국대학교 졸업 예정 증명서가 놓여 있었다.


"알바생 강민준이 아니라, 조태오의 실체를 알고 태성 그룹의 구멍을 메워줄 '전략가'로서 갈 거야. 내 인생 전부를 걸어서라도 하윤 씨 데려올게."


여름밤의 열대야 속에서도 민준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갑고 단단했다.

서윤은 그런 민준의 뒷모습을 보며, 자신이 좋아했던 남자가 단순히 다정한 사람이 아니라, 소중한 것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질 줄 아는 거인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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