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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경험은 항상 소중하다.

by 아티칸
작품과의 첫 만남, 대본을 멀리하라.

메소드 연기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시작부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싶을 것이다. 이제 막 작품과 첫 대면을 했고, 대본을 받아 들고 열심히 봐야 할 때인데, 대본을 멀리하라니? 말 장난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대본을 보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대본을 보되 멀리하라는 것이다. 이건 또 무슨 거지 같은 소리인가? 대본을 보는데 멀리하라고? 내 제자 가운데 한 명이 수업 때 항상 하는 이야기가 있다. 연기 공부에는 참으로 어불성설인 이야기가 많다고 말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연기라는 것은 사람을, 삶을 탐구하는 학문이고 사람과 삶에는 어불성설인 것이 너무나도 많은 것을. 그리고 참 재미있는 것은 그런 어불성설인 것들을 우린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자, 그럼 이제 어불성설인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역할의 삶을 드러내야 하는 배우에게 있어서 대본은 답안지 혹은 역할의 삶 전체가 아니다. 더욱이 이제 처음 마주한 역할의 삶을 대본 하나만을 가지고 처음부터 어떻게 다 이해하고 체감하며, 순식간에 몰입을 할 수 있겠는가? 만약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모든 삶에 통달한 사람이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작품과 첫 만남을 가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바로 처음 대본을 읽으면서 느낀 영감에 대한 가벼운 정리이다. 영감이라는 말이 너무 거창하게 느껴진다면, 첫 느낌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이제 겨우 한 번 읽어 본 작품에 대한 영감, 또는 첫 느낌 정리라니? 이것 역시 괴변으로 들리는가? 이 글을 마지막까지 읽고 꼭 해보길 바란다. 한 번 읽었을 뿐이지만 이미 역할의 삶에 대한 영감과 느낌들이 자신을 감싸고 있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더욱이 그 가운데 어떤 강렬한 영감과 느낌은 당신의 창작 작업에 있어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 될 것임을 명심했으면 한다.

대본을 가벼운 수닷거리로 만들라.

대본을 받아 들고 가볍게 한 번 읽어준다. 이제부터는 누군가와 함께 줄거리에 대해 가볍게 수다를 시작해 보자. 굳이 수다라는 방법이 내키지 않는다면 읽은 내용을 바탕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기 바란다. 마음껏 공상 속으로 빠져보자. '내 몸이 가벼워진다', '뜬다, 뜬다, 뜬다', '상상의 세계에서 빛의 속도로, 무엇을 상상하든 순식간에 다녀온다'라는 식의 유치 찬란한 발상으로 공상의 세계를 휘젓고 다녀 보기 바란다. 조금은 흐릿할지 모르지만, 이미 당신의 머릿속에는 아무리 멀리 가도 다시 돌아올 수 있을 만한 좌표가 입력되어 있다. 수다든 공상이든 중요한 것은 내 첫 경험에 대한 가벼운 체크이다. 첫 만남을 통해서 기억하는 영감이나 감각들을 부담 없이 체크해 보는 것이다. '강 건너 불 구경하듯'이라고나 할까? 강 건너에 불난 사람은 지금 당장 불 끄는 것에 여념이 없어 자신의 삶을 온전히 볼 수 없다. 그런데 아직 우린 당장 불을 꺼야 하는 사람이 아니다. 강 건너 불을 구경하면서 '불 나기 전에는 어땠지?', '불이 크게 난 건가?', '불 끄는 사람은 누구지?', '불 끄고 나서도 힘들겠다', '저런, 안 됐네', '내가 저 사람이라면 어떨까?', '불을 어떻게 끄고 있나?'와 같은 질문과 공감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스스로에게 답을 내리고 공감을 하는 정도로 '불 끄는 사람'이 될 준비를 시작하는 것이다.

첫 경험은 항상 소중하다.

당신은 처음 작품을 읽으면서 이미 역할의 삶이 어떤지 눈여겨 봤을 것이다. 역할을 연기해야 한다는 어느 정도의 부담감도 가지고 읽었다. 만약 연기를 해야 하는 배우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어떤지 알고 싶은 마음으로 집중을 하지 않았나. 작품과 나 사이에 흐르는 감각 하나 하나에 집중하려고 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더 이상 대본 자체에 집중하지 말자. 앞으로 대본에 집중할 시간은 많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만약 이미 조바심으로 자신을 다그치고 있다면, 그래서 다시 대본을 빨리 봐야 한다는 생각이라면, 그리고 대본을 두 번, 세 번, 계속해서 보고 있다면, 머지않아 스크립트의 노예가 될 것이다. 너무 극단적인 생각일까? 첫 경험을 통해 느낀 감각들을 곱씹어 보며 즐길 여유조차 가질 수 없는 부담감에 눌려 있는 사람에게 1차원적인 스크립트 말고 남은 것이 뭐가 있겠는가? 스크립트만을 쫓아가는 기계적인 연기 이상의 것을 기대할 수 있을까? 부정적으로 독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당신의 첫 경험은 항상 소중하다. '부담감'이라는 녀석이 당신의 첫 경험을 기억도 안 나는 10원짜리로 만들도록 내버려 두지 말자. 충분히 곱씹고, 음미하며 되 짚어 보라. 무겁고 다급한 부담감, 또는 불안감은 이제 멀리하자. 잠시 대본을 멀리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