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같은 세상인데 너와 나의 눈에는 다르게 보일까
몇 해 전 온라인을 뜨겁게 달궜던 '흰금-파검'논란을 기억하시는지?
위의 드레스 사진을 보고 흰색/금색 드레스다, 파란색/검은색 드레스다 하고 논란이 일어난 사건이다.
나 또한 친구들과 사진을 보며 파검이다, 아니다 흰금이다 옥신각신 난리를 쳤었고.
나는 아무리 봐도 파란색/검은색으로 보이는데 도대체 어떻게 하면 이게 흰색/금색으로 지각이 되는지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았었다. 흰색/금색이라고 말한 친구가 있었는데, 그 어떤 설명을 들어도 납득이 가지 않았고, 온라인에서도 꽤 많은 사람들이 흰색/금색이라고 말하는 게 이상하기만 했다.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로, 아무리 보아도 내 눈엔 이게 그저 파란색/검은색 옷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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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한 대상을 두고 다르게 지각할 수 있는 것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지각이 불완전하기 때문이리라.
우리가 이 복잡다단한 세상을 두고 '이렇다, 아니다 저렇다'하고 지각하고 다투어 대는 것도 그저 우리의 불완전한 지각 체계 때문은 아닐까.
지난번 맘충 주제에 관하여 글을 쓴 후로 많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무리 아이를 낳고 사회적 약자가 되고, 혐오의 시선을 받게 되었다고 성토한들 그게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사람들도 있을 거라는 점. 어떤 사람은 바쁜 일상을 멈추고 어라, 그럴 수도 있구나, 하고 생각하는 반면 어떤 사람은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맘충짓하니까 맘충이라 불리지, 생각한다는 점.
후자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자기 자신의 직간접 경험과 한정된 지식을 가지고 이 세상을 지각하니까. 마치 내가 저 옷이 어디가 봐서 흰색/금색이란 말이야,하고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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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흔하지만 듣기에는 썩 아름답지 않은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내가 초등학교, 아니 국민학교였나? 3학년 때의 일이다.
청소를 마치고 한적한 주택가를 걸어 혼자 집으로 걸어오는 길이었다.
여름, 늦은 오후의 햇살은 따가웠고 가방은 무거웠다.
내 앞에 가던 아저씨 하나가 땀을 뻘뻘 흘리며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어린이 특유의 무관심한 태도로 내 길을 가는데 아저씨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얘야, 아저씨가 소변이 무척 마려워서 그러는데 이 근처에 화장실이 어디있니?"
"저기 건물 볼링장에 있어요."
나는 퉁명하게 가리키고는 지나가려 했다. 그런데 아저씨가 나를 붙잡고 말했다.
"좀 데려다 줄 수 있겠니?"
짜증이 난 나는 저기 있다니까요, 내뱉었지만 아저씨는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대신 새로운 제안을 했다. 성가신 아저씨였다.
"그럼 저기 담벼락 뒤에서 아저씨가 볼일 볼테니까 서서 좀 가려줄 수 있겠니?"
그 정도는 오래 걸리지 않겠지, 해서 나는 아저씨를 따라 아무도 없는 담벼락 뒤로 갔다.
거기서 아저씨는 바지를 내리고 성기를 꺼내어 흔들었다. 나는 생전 처음보는 광경에 놀랐었다.
뭐 그 다음은 딱히 묘사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시쳇말로 좀 시크한 어린이였던 나는 그냥 집으로 돌아가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엄마가 한참 후에 동네에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 나에게 물었을 때도 나는 아니라고만 했다.
왜냐하면 나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게 창피하고 속상하고, 아무 언급도 안 하고 잊고 싶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엄마는 그대로 넘어가 주었다.
하지만 그 일이 그대로 잊혀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 후로도 나는 커가면서 비슷한 일을 다양한 종류로 겪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야!"하고 불러서 무심결에 뒤돌아보면 보란듯이 성기를 노출한다든지, 조금 커서 대중교통을 타고 다닐 때는 만원 버스나 지하철 안에서 누군가가 내 엉덩이를 만진다든지, 신체의 일부를 비벼댄다든지. 곰탕집 사건으로 논란이 되었던 엉만튀도 겪어봤다. (이 엉만튀 건도 사람들이 가득한 예식장 입구에서 일어난 일이었고, 만지고 도망간 사람은 너무나 멀쩡해 보이는 사람이었던 데다가, 정말 찰나의 순간에 일어나서 당한 나만 기분이 더러워지는... 그래서 소리조차 지르지 못 했던 뭐 그런 찝찝한 일이었다. 뭐 그렇다고 내가 잘 알지도 못 하는 곰탕집 사건에서 누가 유죄고 무죄고 판단하는 것은 아니고.)
이런 종류의 일들은 뭐 딱히 아름답거나 자랑?할 거리도 못 되는 데다가, 너무나 흔하기 때문에 굳이 화제에 올라가지도 못 하는 일들이다. 흔히들 그러지 않는가. 주변 여성들에게 성추행 당한 경험 물어보면, 한 번도 없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바바리맨 한 번 못 본 운 좋은 여학생이 있을까!
옛날 옛적에나 있었던 일 가지고 그러냐고? 글쎄 나는 삼십대 중반이고, 내가 살아온 환경이 딱히 범죄율이 높은 동네도 아닌 그저 평범한 동네들이었다는 점, 엉만튀 사건은 무려 삼십대의 입구에서 겪은 일이니 꽤나 최근이라는 점 등을 감안하면 이런 종류의 사소한 성범죄들은 생각보다 광범위하고 현재 진행형이라는 점을 부정하긴 어려울 것이다.(얼평, 몸평, 면전에서 가슴이 어쩌고, 하는 언어적 성폭력은 뭐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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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경험에도 불구하고 나는 남성을 혐오하지 않는다. 세상을 별로 부정하지도 않는다. 여성과 남성을 어우른 내 대인관계는 그저 평범하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성별과 관계 없이 행복하게 살길 바란다.
나 역시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결혼도 하고, 좌충우돌 행복하게 살고 있다.
(뭐 다만 어릴 적 그 아저씨를 닮은 인상착의를 가진 사람을 만나면 나도 모르게 좀 경계하는 게 있긴 하지만... 그 사건은 상당한 트라우마를 내게 남겼고, 나는 그걸 극복하기 위해 굉장히 노력했었다.)
하지만 살면서 이런 경험을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사람들의 세상이 궁금할 때가 있다.
그들은 인적이 드문 주택가에서 누군가와 단 둘이 걷고 있을 때의 본능적인 공포와 경계심을 알지 못하리라.
그들은 내 의사와 상관 없이 타인의 의지에 따라 노출된 신체 부위를 볼 때의 혐오와 공포를 알지 못하리라.
그들은 타인에 의해 나의 성적 자기결정권이 침해될까봐 경계하지 않아도 괜찮으리라.
그들은 연인과 사랑을 나눌 때 몰카를 찍혀서 헤어지면 유출될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그것이 사회적으로 약점이 되는 공포에 떨지 않아도 되리라.
한 쪽은 당연히 기본적으로 살면서 학습하게 되는 공포와 경계를, 한 쪽은 전혀 학습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
이게 기울어진 권력이다. 이게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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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보는 세상은 내가 보는 세상과 다르다.
그건 그들과 내가 가진 권력이 달랐고, 겪어온 경험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날 때부터 세상이 이런 걸. 누구 한 사람이 일부러 만든 것도 아니잖아.(놀랍도록 순응적인 나의 사고방식이여.)
내 주변의 많은 남성들, 이런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남성들이 뭐 악하냐, 성차별주의자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에 나는 아무에게도 분노나 원망 비슷한 걸 품을 수조차 없었다.
그들은 그냥 몰랐다.
몰라도 된다는 것도, 몰랐다.
그냥 그래서, 그들이 보는 요즘 세상은 놀랍도록 평등 혹은 여성이 지나치게 이득을 보는 세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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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드레스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어떤 사람에게는 파란색/검은색으로 보이는 드레스가 어떤 사람에게는 흰색/금색으로 보인다면.
같은 세상을 두고 서로 죽어도 이해할 수 없는 인식의 차이가 있다면.
우리가 서로에게 할 수 있는 것은 조롱이나 비난, 혐오일 수도 있지만 설명과 설득일 수도 있으리라.
왜냐하면 우리는 서있는 위치가 다르니까. 우리는 다르다고, 다르게 살아왔다고.
서로에게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방대한 브런치의 바다에 한 컵의 생수를 붓는다.
나는 여성으로 살아오면서, 남성으로 살아온 너와는 같은 세상에서 다른 경험을 했다고.
그래서 나는 너에게 평등한 이 세상이 평등하지 않게 지각된다고.
내 딸은 너처럼 이 세상이 평등하지 않음을 지각하지 않고 살면 좋겠다고.
내 이야기를 들어주길 바란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