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스트가 환영받은 역사가 있었던가
우선 글에 들어가기에 앞서 내가 페미니스트인가 하는 자기 검열을 좀 해보도록 하겠다.
페미니스트 : 페미니스트는 페미니즘을 따르거나 주장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로, 여기서 페미니즘은 성 차별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사회구조로 인해 여성에게 주어지는 억압에 저항하여 성평등을 이룩하고자 하는 사상을 말한다. 이는 '여성의 특질을 갖추고 있는 것'이라는 뜻을 지닌 라틴어 '페미나(femina)'에서 파생했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은 페미니즘을 '성별로 인해 발생하는 정치ㆍ경제ㆍ사회 문화적 차별을 없애야 한다는 견해'라고 정의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페미니스트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여기서 논란을 삼을 수 있는 부분은 '성차별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사회 구조'와 그로 인해 '여성에게 주어지는 억압에 저항하여 성평등을 이룩'하고자 하는 사상, 뭐 이 정도 부분이겠다. 과연 우리가 사는 이 사회가 성차별적인 사회이며 여성을 억압하는 사회인가에 대한 논의는 차치하고, 내가 과연 그런 사상을 따르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냐고 하면.
잘 모르겠다.
왜냐하면 나는 이 사회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 중의 하나이고, 내 삶에서 부딪히는 단면들에 대하여 때로는 성차별적이라고 느끼지만 또 때로는 너무나 당연하게 넘어가는 인간 1일 뿐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안, 예를 들면 명절 문화나 직장 다니며 하는 육아 문화 등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생각하면서도 상대적으로 내 삶과 거리가 있게 느껴지는 다른 여러 사안들에 대해서는 둔감하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원래 자기 손톱 밑의 가시가 제일 아픈 게 사람 본성이니까.(마찬가지 이유로 페미니즘에 대해서 별 생각이 없거나 적대적인 사람들에 대해서도 크게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은 원래 그런 것 아닌가.)
해서 나의 어떤 단면은 페미니스트라고 정의할 수 있겠고, 또 어떤 단면은 아니라고 정의할 수 있겠기에 나는 아직도 '너는 페미니스트냐'라는 질문에 그렇다 혹은 아니다라고 딱 부러지게 말을 못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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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상에서 성별갈등 내지 타 성별에 대한 혐오란 해묵고도 뜨거운 주제다. 최근 불거진 '동아제약 면접 사건'만 보아도 그렇다. 결국 사건은 대표가 사과하는 걸로 종결이 났지만 이 사건을 두고 청와대 청원까지 등장하고, 한남이네 한녀네 페미네 하는 논쟁(이라고 봐야할까)이 이곳 저곳에서 벌어졌었다. 뭐 딱히 이 사건이 아니더라도 인터넷 상에서 페미니스트 조롱은 흔하다. 너 페미니? 여기 페미 많네.
최근 일이라고? 일부 극성 페미니스트들의 작태가 너무 심해서 페미 혐오가 심해진 거라고?
우리 솔직해집시다. 페미가 환영받은 역사가 있었던가. 없잖아.
90년대 '여성상위시대'라는 표현이 유행했던 것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런지. 지금의 잣대로 보면 90년대의 여성인권이란 지금과 비교하기 어려운 수준일게다. 하핫. 그런데 여성상위시대?
2000년대 초입에 들어서 인터넷 문화가 급속도로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등장한 표현은 또 뭐였더라. '꼴페미'. 꼴통 페미니스트. 그들이 당신에게 대체 무얼 했기에?
2010년대 유행했던 흐름은 미러링. 메갈. 그때 친구들과 나눴던 대화를 기억한다. 언제나 온건주의자였던 나는 '혐오 표현이나 그런 사진이나 문화 같은 거 너무 심하다. 옳지 않은 행동이다.'라고 주장했고 모인 친구들의 대부분은 비슷한 의견이었다. 그 자리에서 한 친구가 했던 말이 십년 가량 지난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남자들이 같은 행동을 해왔을 땐 어땠는데? 여자들이 똑같은 행동을 하니까 시끄럽잖아.' 우리는 침묵할 수 밖에 없었다.
2020년대. 현재에도 페미는 조롱의 단어로 쓰이고 있다. 얼마 전 일어난 세종대 윤지선 교수의 수업에서 일어난 사건을 보면, 페미란 조롱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적극적인 증오와 공격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듯하다.
한편으로는 납득 가능한 일이다. 비단 성별 뿐만 아니라 기존의 질서를 뒤집는 일은 언제나 갈등이 수반되었다. 1:9로 나눠먹던 것을 5:5로 나눠먹자고 주장하면 그 누가 '가져가십시오'하고 주겠는가? 사회 현상과 문화란 특히 그렇다. 내 입장에서 보면 난 죽어라고 달라고 주장해서 1:9를 2:8 혹은 3:7로 바꿔놨는데 그 빼앗긴 파이를 마땅히 받았어야 하는 쪽에서야 분노하는 게 당연하다. 본래 사람이란 게 그러하니까. 게다가 1:9를 3:7로 바꾸기 위해서 기존의 사회 구조를 억지로 틀면 파이를 빼앗긴 것 이상으로 불이익을 받는 집단도 당연히 존재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페미를 혐오하는 이들을 이해한다. 그들은 '페미 때문에' 기존 질서 내에서 당연히 받았어야 할 몫을 박탈당하게 된 셈이니까. 그 기존 질서가 정당한가는 차치하고서라도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 마땅히 해야 하는 한 가지 질문이 있다.
기존 질서는 정당한가. 정당하지 않다면, 기존 사회의 공고한 안정을 흔들더라도 그 정당하지 않음을 바로잡을 가치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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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는 욕이 아니다. 하지만 페미는 욕일 수 있다.
기존 질서에 도전하는 시도가 모두 옳을 수는 없다. 사회는 거대하고 복잡하나 거기에 의문을 제기하는 개인은 지극히 작고 어쩔 수 없이 편협한 탓이다. 그렇다고 그 시도를 모두 부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사회를 구성하는 것은 결국 개인이기에, 변하지 않는 사회란 없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기존 질서에 도전하는 이들은 얼마나 용감한가. 그들은 자신들이 환영받지 못할 것을, 조롱을 받을 것을 알고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페미가 욕일 수 있을까. 아니.
하지만 빼앗긴 자들에게 페미란 당연히 욕일 수 밖에 없다. 그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인간적인 일이다. 그들이 욕으로 던지는 '페미'라는 단어가 듣는 사람에게는 욕이 아닐지언정 말이다. 씁쓸한 일은, 어차피 이런 시도로 재편되는 이권조차 사회의 약자 사이에서-더 어리고 혹은 더 늙고, 더 권력이 적고, 더 경제력이 적은- 분배가 된다는 점이다. 마치 짖는 개에게 음식의 가장자리부터 던져주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