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 가라사대
나는 생각 부자다. 생각이 많다. 넘치게도 많다. 하고 싶은 게 많아서 이래저래 욕심도 많다. 도전은 늘 약간의 두려움을 수반하지만, 안 하고 후회하는 게 끔찍이도 싫어서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해보고 싶은 건 다 해보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내 머리는 늘 복잡하고,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자꾸 뭔가를 파생시킨다.
하지만 이런 내게 유일하게 한 가지뿐이던 생각이 있다. 바로 '사업'을 하겠다는 결심이다. 내 주변에 사업을 하고 있거나 창업을 한 친구들은 전무하다. 아, 오이 삼촌이 개인 식당을 하지만 그도 원래는 분당 회사원이었으니 애초에 사업으로 시작한 건 아니다. 고로 내게는 처음부터 사업을 한 사람도, 직장인이 아닌 방법으로 성공한 사람이 있지도 않다. 에브리바디 회사원이거나 전업 주부다. 그런데 이러한 환경 속에서 자란 내가 어떻게 일편단심 사업가를 꿈꾸게 됐을까?
옛날 옛적, 내 첫 꿈은 사업가가 아니었다. 물론 직업적 목표에 한정해서 말하는 거다. 원래 꿈은 화가였다. 낭만적인 예술가. 그것이 내 꿈이었다. 새하얀 공간을 온갖 색채로 채우고 자신의 세계를 펼치는 멋진 사람. 화가는 내게 동경의 대상이었고 그래서 바라 마지않는 가장 순수한 꿈이었다. 각자 장래희망을 적어 발표하라 요구하는 초등학교에서 꽤 오랫동안 당당하게 화가를 장래희망으로 말하고, 책상 위에도 적어두었던 기억이 난다. 아마도 나는 정말로 그림을 사랑했던 것 같다.
지고지순하게 화가가 될 뻔했던 아이는 어째서 그 꿈을 버렸을까? 그 이유에는 역시 미래 전망이 있다. 자랄수록 그림 그리면 굶고 산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고, 나 또한 화가의 입장에서 배신자가 되었기에 내 오랜 꿈을 버렸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어쩐지 '디자이너'가 멋져 보이기 시작했다. 디자이너! 입 안에서 부드럽게 굴려지는 고급진 발음에,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이 하는 거라 하고, 화가보다 돈도 잘 번다고 하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때 즈음 친했던 친구 하나도 그림 실력과 미감이 좋은 아이였는데, 괜스레 경쟁심이 불붙어질세라 내 꿈도 디자이너로 바꾸었다. 화가는 뭔가 고지식한 느낌이야. 디자이너? 좋아, 멋진 이름인걸. 다소 과감한 발상에서 비롯되었지만, 그때야 아무렴 어때. 나는 그림쟁이가 선택할 수 있는 삐까뻔쩍한 최신 직업을 고른 것이다.
화가와 디자이너는 나의 역사 안에서 가장 오래 머문 꿈이다. 물론 그 사이 약사, 마술사, 수의사, 작가, 선생님, 요리사 등 스치고 지나간 직업들도 많다. 하지만 디자이너는 당차게 굴러온 돌로써 박힌 돌이었던 화가를 쳐내고 치열한 대학 입시 때까지 굳건히 자리를 지켰다. 그래서 하루를 꼬박 서서 13시간 동안 그림을 그리고, 날마다 몸무게 인생 기록을 경신하는 일도 해낼 수 있었다. 그렇게 미대생이 되었다. 솔직히 인간사에 한 획을 그을 깔쌈한 디자인을 해낼 자신은 조금도 없었고, 그저 그림 외길 인생의 최종 종착지는 찍어보자 싶었다. 거기서부터가 진짜 시작이라는 건 흐린 눈으로 모른 척하면서. 아이고, 내가 왜 그랬을까.
그러다 중학교 중반 즈음, 사업 열망이 피어났다. 그렇다고 디자이너를 포기한 건 아니다. 디자이너를 하긴 할 건데 어떻게든 그걸 사업으로 엮어야겠다는 생각이었달까? 내 것을 만들고 싶다는 마음 반, 사업에 성공해서 크게 한 탕 하고 싶다는 욕심 반이었다. 중학교 시절의 나는 인생에서 가장 자존감이 낮았던 사람이었던지라 외부 환경을 의식하면서 남몰래 사업가를 꿈꾸기 시작했다. 회사원 해서는 대박 근처도 못 가니 사업, 그래 사업을 하자. 역시나 뭘 모르고 야심 차게 먹은 마음이다. 그렇지만 가슴 기저에 뭉근하게 깔린 그 당돌한 마음은 10년 넘게 내 안에서 살아 숨 쉬었고, 나는 뚝심 있게 사업의 길을 걷기로 결정한다.
살면서 회사원, 직장인을 꿈꿔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어떻게든 사업을 하자, 아직은 희미하다 못해 흐릿해서 잘 보이지도 않는 내 사업이라는 걸 어떻게든 해보자. 그 생각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다른 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무조건적으로, 어떻게 해서든 꼭 내 것을 만든다. 나는 그렇게 한다. 그리고 성공한다. 디자이너를 해도 사업할 거고, 사업이 잘 되면 화가도 할 거고, 그러다 너무 잘 되면 좋겠네? 이런 흐름을 좇아, 아니 내 오랜 소망을 좇아 일단 사업가가 되었다. 예술을 꿈꾸는 사람이 무엇이 두려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