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땅에 서긴 섰다

시작을 위한 시작

by 아인장

김밥은 어떻게 쌀까?

김밥을 싸려면 일단 김이랑 밥이랑 햄, 당근, 단무지, 시금치, 어묵, 맛살··· 요정도 재료가 필요하겠고 밥에는 꼭 소금이랑 참기름, 깨를 넣어 살짝 간도 하는 게 좋겠지. 내가 김밥을 예시를 드는 이유는 손 많이 가는 음식임에도 불구하고 필요한 재료와 조리법을 명확히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전공이 계란말이와 순두부찌개인 나는 김밥 말기에 능숙하지 않아서 만드는데 시간이 좀 걸리긴 하겠지만, 넉넉한 시간과 넓은 아량으로 시식해 줄 사람만 있다면 얼마든 정성스러운 김밥을 말아낼 수 있다. 그렇다면 사업을 시작하기 위해 도대체 뭐부터 해야 할까? A부터 Z까지 나한테 설명해 줄 사람? 거기··· 아무도 없어요?


출처 : 네이버웹툰 「대학일기」


내가 재미있게 본 웹툰 중 「대학일기」라는 작품이 있다. 단순한 그림체로 깊이 있는 공감을 이끌어내는 작품이라 대학생 시절 내 상황과 오버랩시키며 정말 재미있게 봤었다. 그리고 152화의 내용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고등학교와 대학교 생활을 고기에 비유한 인상 깊은 장면이다.


만약 공부가 '고기'라면, 입시공부는 타기 전에 먹으라고 선생님들이 손수 구워 잘라주는 고기이며, 대학은 교수님이 살아있는 소를 던져주는 것과 같다는 내용. 솔직히 고등학생 때는 이 회차를 읽을 때 깊이 공감하기 어려웠다. 대충 어떤 비유인지 짐작 가긴 하나, 정말 공감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대학생이 되어 알았다. 정말로 그렇다는 것을. 아니, 나한테 왜 그래요.


미술 입시학원을 다니던 나의 가장 큰 고민은 대학에 가서 쓸 디자인 프로그램이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컴퓨터와 친해지지 못했다. 초등학교에서 방과 후 컴퓨터반을 다닐 때에도 유난히 따라가는 게 늦었다. 내가 가진 유일한 알레르기는 컴퓨터 알레르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컴퓨터와 우정을 나누기 힘들었다. 따라서 당연히 어도비 일러스트레이터나 포토샵 등 대표적인 디자인 툴 하나 다룰 줄 몰랐고, 내가 할 줄 아는 거라곤 종이와 붓으로 그려내는 그림이 전부인데 어쩌나 걱정이었다.


당시 입시학원 선생님들 —이자 이제 보니 알바들이었던— 은 대학생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말을 믿기는 아주 쉬웠다. 그들이 말하길, 대학에 가면 다 천천히 알려준단다. 수업 시간에 가르쳐주기도 하거니와 해보면 다 할 수 있는 별로 어려운 거 없다는 말들. 나를 까맣게 속이는 줄도 모르고 그럼 대학 먼저 가야겠네요, 하고 그림에 열중했다. 알려주기는 개뿔. 나는 하늘에 맹세하건대 자기 주도적 학습으로 모든 것을 마스터했다. 당신들은 왜 나를 속였나요. 아니면 그림에 집중하게 만들려는 고단수 작전이었나요.


동기들은 한 번쯤 다니던 디자인 학원이나 스터디 한 번 없이 순도 100%의 강인한 의지로, 유튜브 선생님들과의 규칙적인 만남을 통해 모든 디자인 프로그램을 독학했다. 사람이 하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못할 것이 없다는 걸 그때 배웠다. '매끄럽게 도구(Smooth Tool)'를 습관처럼 사용하는 나를 보고 그건 뭐냐고 묻던, 매달 몇 십만 원씩 돈 내고 학원에 가던 동기들의 놀란 눈동자가 선명하다. 미안, 사실 그때 너 도대체 학원에서 뭘 배우니 묻고 싶었어. 세상에 좋은 강의들, 그것도 공짜인 강의들은 무수히 많고 스스로 찾아먹을 노력만 하면 되었으므로 어려웠지만 꽤 잘 해냈다. 유튜브 선생님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이러한 스스로 척척 정신의 디자인 학도는 교수님들이 던져주던 싱싱한 소를 어떻게든 잡아 요리했고, 레어든 미디엄이든 다 타버렸든 뭐든 간에 구워내 무사히 접시에 올렸다.


5년도 더 된 이야기를 길게 풀어낸 이유는 적어도 대학교까지는 소라도 던져준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다. 내가 소를 구하러 갈 필요는 없다. 적당히 넓은 방목장에 풀어둔 소를 어떻게든 하면 될 일이었던 대학생과 달리 사회는 냉혹하다. 어딘가에 소속되거나 개척하거나 고립되는 것 모두 순전히 나의 몫이다. 내가 노력하는 만큼 결과가 나올 거라는 보장도 없다. 내가 선택하면 좋을만한 길을 제시해 주거나 추천하는 사람도 없다.


시간에 나를 맡기고 싶은 사람이 바로 나였고, 일정 시간이 지난 후 성공한 내 모습을 마주하고 싶은 사람도 나였으므로 뭐라도 해야 했다. 허송세월 보낼 용기도 없고, 졸업과 동시에 불꽃 열정을 불태워 아자자 헤쳐나갈 길도 몰랐다. 그래도 이제는 오랜 꿈에 도전할 만한 기본 능력치는 채웠다는 주관적 판단 아래 일단 사업을 해보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후 뭐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도 안 오는 게 이멀전시라면 상당한 이멀전시였다. 내게 도움을 줄 리듬 박사님이 2년 전에는 안 계셨다는 게 참 아쉽다.



아무리 짱구를 굴려봐도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사업자 등록'이었다. 사업 아이템이야 첫 사업이니 내가 좋아하면서 지금 할 줄 아는 걸 하자 싶어 스티커를 만들기로 했기 때문에 대한민국에서 합법적으로 사업을 하기 위한 법적 조치를 취하는 게 우선이었다.


근데 사업자 등록은 어떻게 하는데? 어디서 하고, 필요한 서류는 뭐가 있으며 놓치지 말아야 할 조항이나 조건이 있는지? 사업장 주소는? 사업장 번호는? 업태나 업종은? 사업자 등록은 몇 월에 하는 게 좋다던데 그게 맞나? '예비 창업자 분들, 지금 당장 사업자 등록을 멈추세요' 하는 영상은 또 왜 이렇게 많은 거야? 수많은 물음들이 나를 압박했다. 당당하게 내가 다 알아서 한다 큰소리 땅땅 쳤는데, 알아서 할 수 있는 게 단 한 개도 없었다. 버튼 하나 잘못 누르면 돌이키기 어려워 보였고, 지금 멋모르고 신청하는 문서가 훗날 어떤 허점으로 돌아올지 가늠이 안 돼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사업자 등록증이 없으니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몇 주를 끙끙 앓았다. 가장 문제가 된 건 사업장 주소지 문제였다. 관련한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와 걱정도 있고 해서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에효, 뭐 하나 쉬운 게 없어 정말 서러웠다. 앞서 말했듯 내겐 사업 방면으로 도움을 받거나 조언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으므로 정말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엄마의 고등학교 동창 중 한 분을 만나게 됐다. 그분은 엄마의 친구로 10년 넘게 온라인 판매를 해오신 분이었다. 나는 그 분과의 일면식도 없을뿐더러 나 필요하다고 도움을 청하기가 어쩐지 죄송스러웠다. 당시 너무 힘들어하던 나를 보고 엄마가 친구에게 혹시 약간의 도움을 구할 수 있는지 물었고 그분이 감사하게도 흔쾌히 만남을 약속하셨다.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을 물어보자, 사업자 등록은 어떻게 해야 하고 지금 당장 사업을 시작하려면 뭐부터 해야 하는지 묻자. 경험자가 볼 때는 우스울 테지만, 당시의 내 골머리를 썩인 약 30개 이상의 빼곡한 질문들을 적어 평일 어느 날 그분의 사무실로 찾아가기로 했다. 아직 만나서 들은 얘기도 없으면서 고민을 털어놓을 누군가가 생겼다는 생각에 조금은 부담을 내려놓았던 것 같다. 그녀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나면 길이 보일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고, 오늘보다 한 걸음은 더 나아갈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믿음이 생겨난 것도 사실이다.


정말로 그 분과 만난 그날 바로 사업자 등록을 했다. 허무할 만큼 절차가 빨랐다. 별 거 아닌 일에 오래 맘고생해서 억울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사업을 시작하는 첫 관문을 넘었다는 점에서 그 분과의 만남은 나름의 의의가 있었지만, 다른 감정도 좀 있었던 걸 기억한다. 너무 현실적이라서 좀 아팠던 말들. 전혀 이해받지 못하고 있다는 답답함. 하필 지인이고 나보다 어른이라 뭐라 큰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까닭. 분명 일정 부분 도움을 받은 건 맞는데 시작도 전에 찬물도 끼었어져서 찔끔 눈물도 났다. 당시의 에피소드도 길게 풀어보겠다. 어찌 됐든 24년 4월 중순, 길고 길었던 사업자를 향한 길에 마침표이자 시작점을 찍었다.



사업자 등록증이 나오니 그다음은 일사천리로 해결된다. 미리 디자인해 둔 로고로 로고 스탬프를 만들고, 택배 상자를 비롯한 여러 포장물품을 구매하고, 상품 제작에도 박차를 가했다. 사업자 등록증이 생기니 네이버 스마트스토어 가입도 가능해졌다. 그래서 온라인몰도 열고, 브랜드 SNS 계정도 만들었다. 남들 하는 건 다 따라 했다. 두려움도 컸지만, 하면서 배우자는 마인드로 일단 부딪혔다. 운 좋게 몇 번 편의점에서 택배 보내던 나를 기억한 택배 기사님의 연락으로 택배 계약도 하게 되었고, 송장 기계도 샀다. 이후 기계가 뱉어내는 송장은 한 달에 겨우 1-2장 있을까 말까 했지만 일단 칼을 뽑았다는 것에 의의를 둔 나다. 뭐든 의미 부여가 중요하잖아요, 안 그렇습니까?


비용 들이는 준비는 착착 진행되었다. 돈이 있으면 다 해결되니까. 일단 필요한 것들이니 투자다, 생각하고 그동안 모아둔 자본을 썼다. 밤새서 영상 만들고 출퇴근하고 출장 다니고 아이들 가르치면서 스스로에게 쓰는 돈은 식비 한정으로 저축해 온 꿈을 위한 돈이다. 하고 싶은 일을 위한 지출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사업의 길에 오르면 들어오는 돈에 비해 나가는 돈이 곱절이라는 것과 가만히 앉아 쉬는 시간마저 성장을 막는 방해물이라는 점 역시 차차 알아가는 부분이다. 이후 '아티클로젯'이라는 게 여기 있다 소리치고 사람들 눈앞에 알짱거리는 일이 중요해지면서 머리는 점점 복잡해지는데···. 뭐 하튼 일단 스타트 라인은 끊었으니까 그걸로 반 정도는 온 거 아닐까? 시작이 반이라고 믿고 싶다.


서긴 섰다, 근데 이제 맨땅인.

정말로 아무것도 깔지 아니한 정갈한 바닥 위에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