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찌도 처음은 이랬다

명품을 좋아하세요?

by 아인장

발렌시아가. 내 최애 명품 브랜드다. 스물셋의 연말, 1년 간 열심히 일한 나에게 주는 선물로 약 35만 원 가격의 발렌시아가 카드지갑을 샀다. 당시 쓰던 지갑이 뜯어지고 낡아서 새 지갑을 사고 싶었다. 기존 지갑은 대학교 입학 선물로 이모가 사줬던 검은색 반지갑이었다. 나는 물건 하나를 오래 쓰는 타입이라 해당 지갑을 사계절 내내 들고 다녔고, 이제 놓아줄 때가 온 것이었다. 현금 쓰는 일이 줄어드니 지폐와 동전을 넣는 공간은 불필요해져 얇고 콤팩트한 카드지갑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기도 했다.


휴학생이었던 1년 동안 꼬박 일을 했다. 영상 디자인 일과 청소년 교육 일을 했는데, 참 많은 밤을 새우고 회의도 하며 사회를 배웠다. 서울, 하남, 공주, 전주···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때 정말 많은 것을 배웠더랬다. 가령 회사 대표님과의 교류와 팀워크 방식, 다소 부당하거나 버벅이지 않고 차근차근 표현할 필요가 있는 상황을 용기 있게 헤쳐나갈 수 있는 깡다구와 내 돈을 벌어 쓴다는 자부심까지. 스물셋의 나는 때론 디자이너였고, 영상 STAFF였고, 선생님이었다. 모든 일은 해볼 만한 가치가 있었고 그에 걸맞은 깨달음도 아주 많았다.


정말 빠듯한 휴학 시절을 보내며 스스로에게 선물한 물건은 단 하나도 없었다. 원래 뭔가를 잘 사는 편이 아니다. 하지만 21년도의 나는 스스로조차 부끄럽지 않을 만큼 열심히 살았으므로 나를 위한 무언가를 하나 정도 꼭 하고 싶었다. 고민 끝에 현재 나에게 가장 필요한 물건은 지갑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딱 하나만 살 거고, 자주 쓰는 필요한 물건이니까 좋은 걸로 사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그래서 큰맘 먹고 엄마와 하남 스타필드의 발렌시아가 매장에 들어갔다. 부모님한테 명품 하나 안 사줬으면서 내 것을 사려니 어쩐지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제 것도 하나 안 사는 딸은 겨우 하나 사는 물건에도 부모가 마음에 걸린다. 그래서 엄마도 하나 골라보라고 했다. 명품을 자주 구입할 능력이 되는 입장에서 100만 원은 큰돈이 아닐지 몰라도 나에게 100만 원은 쓴소리 들으며 밤새고, 쉴 새 없이 울리는 연락과 디자인 수정의 수정의 수정 작업을 거치며 번 돈이었기에 결코 작은 돈이 아니었지만 엄마에게 라면 얼마든 쓸 수 있었다. 고작 100만 원이 즉흥적으로 결정한 최대 한도의 지출 상한선이었던 게 인상 깊다. 아직 명품 가방은 못 사주더라도 명품 지갑 정도는 쿨하게 결제할 마음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필요 없다고, 지갑 있다고, 발렌시아가는 본인 취향이 아니라고 거절했다. 그래서 그럼 다른 매장에 가보자고 했더니 그렇게 손사래를 친다. 나중에 돈 더 많이 벌면 그때 사주란다.


"왜, 옆 구찌도 있는데 한 번 보고 오자. 구찌는 괜찮지?"


구찌를 마다할 사람은 없지 싶어 제안했다. 에잇, 조금만 더 꼬시면 넘어올 것 같았는데! 엄마 손을 잡아끌었던 기억이 나는데, 그걸 그렇게 세게 막던 엄마의 손아귀 힘이 더 기억에 남는다. 필요 없다고 뭐 그리 비장하게 말하는지. 발렌시아가가 아니더라도, 엄마도 명품 지갑 하나 쓰고 싶을 텐데 분명 딸내미 코 묻은 돈 쓰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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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훈훈한 외모에 친절하기까지 했던 발렌시아가의 모델 같은 남자 직원분의 설명과 추천으로 내 마음에 쏙 드는 카드 지갑을 샀다. 내돈내산 첫 명품이라, 이 물건을 구입하는 게 맞는지 정말 오랜 시간 고민하다 산 거라 아주 설렜다. 뿌듯했다. 명품은 쇼핑백도 달랐다. 황금색 쇼핑백이었다. 이건 얼마 후 당근에 팔았다. 스스로에게 의미 있는 이 날을 기억하고 싶어 설렘을 안고 사진도 남겼다. 이때가 11월이어서 미리 받은 크리스마스 선물 같은 기분이었다. 이후 한동안은 카드지갑을 침대 머리맡 서랍에 넣어두고 아침에 눈 뜨자마자 꺼내보고 또 꺼내보았다. 책상에서 일하다가도 슬쩍 꺼내보곤 했다. 어린이가 받고 싶었던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으면 없어질까 계속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과 같은 마음이었던 것 같다. 지갑을 보며 시작하는 하루가 기분 좋았고, 그 지갑은 열심히 산 나를 상징하는 물건 같아서 볼 때마다 자긍심도 차올랐다.


허무하게도, 시간이 지날수록 지갑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조금씩 줄어들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처음 샀을 때만큼 행복하지도, 꺼내볼 때마다 좋아 죽지도 않았다. 변해버린 내 마음 때문에 지갑에게는 좀 미안하지만, 이렇게 한 마디 하고 싶다. 너도 어쨌든 지갑일 뿐이야. 부디 내 은빛 반짝이 발렌시아가 카드지갑이 배신감의 눈물을 흘리지 않기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젼히 널 사랑하긴 해. 현재 내 최애 지갑은 우유팩을 재활용하여 만든 15,000원짜리 환경 친화적 지갑이다. 카드만 들고 다닐 수 있으면 되지.


명품 브랜드는 현재 모두 번쩍번쩍한 외관의 매장과 고액의 상품들로 사람들을 사로잡는다. 물론 사람들이 명품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이유에 대해 많은 학자들을 스스로의 만족보다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오는 인정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어느 정도 동의한다. 다행히 내 첫 명품은 스스로의 만족에서 비롯되었고, 엄마가 어렸을 때부터 교육시킨 대로 10번 생각해 보고 샀다. 이렇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산 명품이라면 정말 귀하고 또 귀할 수 밖에. 내가 그랬다. 하지만 그렇게 산 물건도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처음보다 마음이 식는다. 그런데 남의 눈을 의식해서 산다면 결코 건강한 소비이자 행복한 소비하고 할 수 없겠지. 최초 구매 시기보다는 소비로부터 오는 설렘과 행복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가끔 발렌시아가 지갑을 꺼내어 볼 때 느끼는 감정은 자부심이다. 정말 열심히 일한 나를 위해 멋지게 산 선물. 내가 착실히 살았다는 증거. 좋은 거 하나 내 손으로 직접 구입했다는 뿌듯함. 명품 그 이 면을 장식하는 감정이 보람차서 지갑을 산 이래 지금껏 한 번의 후회도 없다는 점이 의미 있다.


출처 : 구찌 코리아 공식 웹사이트


아무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세상 사람들이 이리도 좋아하고 선망하는 명품도 나름의 과거가 있다는 것이다. 멋들어진 최상위 자리에 오르기 전에 그들에게도 도전이었던 시작이 있었다. 나는 가끔 그들이 명품이 아니었을 때를 찾아본다.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것들이 가장 낮은 곳에 있었을 적이 나를 자극한다. 꼭 브랜드가 아닌 사람도 마찬가지다. 대단한 모든 것들은 미약한 시절이 있다.


오래전이라 흑백으로 남아있는 구찌의 과거는 지금의 위상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구찌의 설립자인 구찌오 구찌는 구찌를 처음 세상에 내놓을 때 훗날 자신의 브랜드가 손꼽히는 명품이 될 줄 알았을까? 혹시 그런 모습을 선명하게 꿈꾸었을까? 만약 그가 영혼이 되어 우리 눈에 보이진 않은 채로 자유롭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면 전 세계 곳곳에서 번쩍이는 매장을 보고 전혀 생각지도 못했는데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마도 그가 분명 세계적인 브랜드가 되는 자신의 이름을 상상해 보았을 거라고 믿는다. 내가 그렇게 믿고 싶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구찌는 많은 이들이 동경하는 멋 중 하나이고, 명품 브랜드를 호명할 때 빠지지 않는 고유 명사가 되었으니 그가 진심으로 그러길 자랐다면 현재 그의 바람은 환상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구찌뿐만 아니라 샤넬, 에르메스, 버버리 등 모든 명품들에게도 비교되는 과거가 있다. 브랜드 가치와 메시지를 전달하며 지난 100여 년을 넘게 버텨온 그들이 나는 정말 멋지다. 사업의 디폴트 값은 폐업이란다. 맞는 말이다. 모든 사업은 '망한다'를 기본 전제로 어떻게든 망하지 않기 위한 방법을 모색한다. 어떻게든 버티고 유지하며 그렇게 조금씩 성장해 간다. 따라서 모든 브랜드 오너는 꿈꾼다. 언젠가 내 브랜드도 구찌처럼 유명하고 세게적이 되기를. 무한한 사랑과 관심을 받기를. 내가 그렇다.


아티클로젯이라는 이름을 처음 연구하고 로고를 만들 때, 언젠가 이 로고가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고급스러운 현대 공간에서 화려하게 빛나기를 꿈꾸었다. 곡선과 직선, 별의 조합으로 만들어진 가독성 좋은 로고가 많은 사람들의 입으로 읽히고 눈으로 훑어지기를 바란다. 멀리서 'arti-'로 시작하는 알파벳이 보인다면 곧 'articloset' 아니냐고 추측하게 되길 희망하고, 옷장 중에 제일 유명한 옷장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지금은 작아서 세상의 무수한 브랜드 사이에 끼어있는 모양새일지 몰라도 머지않은 미래에는 나 혼자가 아니라 여러 직원들, 동료들과 으쌰으쌰 힘내며 일궈나가는 그런 예술 브랜드가 되고 싶다. 구찌도 처음에는 이랬듯, 아티클로젯의 처음도 현재는 이렇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결말이 창대하기를 진심으로 꿈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