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표류되어 본 적 있는 사람? 혹은 조난당해 본 적 있는 사람? 나도 없다. 그런데 그런 느낌을 받아본 적은 있다. 세상이라는 망망대해에서 두둥실 떠다니고 있다고 느낀 사람이 바로 1년 전의 나다. 그렇다고 지금은 그런 느낌이 없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인간은 명백히 평생을 떠다니다 가지만, 작년의 난 그것조차 처음이라 내가 지금 어디로 흐르는지, 멈춰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소리쳤다. SOS! 여기 사람 살려.
구조 신호를 외친 이유는 엄마 친구분과의 만남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당시 나는 사업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답답해 미칠 지경에 우울까지 추가된 나를 본 엄마는 온라인 판매 사업을 하는 친구에게 연락을 했고, 우리는 일주일 후 바로 만났다. 엄마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경기도 안양시로 갔다. 가는 길에 무얼 여쭤볼까, 빈 손으로 가긴 뭐 하니 뭘 사야 할까 고민했다. 업무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점심시간에 맞춰 가기로 했는데 차가 막혀서 예상보다 조금 늦게 도착했다. 나가서 밥을 먹고 와 이야기를 하기에는 시간이 빠듯해 가는 길에 이삭 토스트를 샀다. 계란까지 넣은 두툼한 걸로 골랐다. 스타벅스에서 쿠키도 한 박스 샀다. 일하면서 하나씩 집어먹기 좋은 게 낫겠다 싶었다. 뭐가 됐든 조공품이었달까.
찾아가기로 한 분을 L이라 칭한다. L의 사무실은 내 생각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사무실 하면 하얀 벽과 공간을 분리하는 네모난 파티션, 컴퓨터와 서류가 가득한 책상 이미지가 떠오르는데 전혀 아니었다. 사무실보다 창고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사무실도 회사원과 자영업자가 다르겠지만 특히 온라인 판매를 하는 분이라 그런지 박스 포장된 상품들이 빼곡했다. 사람이 앉을 수 있는 공간도 박스 사이에 있었다. 박스들은 내 키만큼 큰 것도 있고 소형 택배 사이즈도 많았다. L은 우리를 반겼고, 엄마와 나는 인사를 하고 안내받은 자리에 앉았다. 앉은 자리 뒤에는 상품 컷 촬영을 위한 작은 촬영 공간도 있었는데, 보면서 나도 저렇게 해야 할 텐데 저건 또 어떻게 하는 걸까 의문이었던 기억이 난다.
다른 사람에게 내 생각을 주입하고 싶을 때가 많다. 설명하지 않고 그 사람과 두뇌를 잠깐 공유하고 싶을 때가 있지 않은가. 말로 다 하지 못하는 내 머릿속의 청사진을 저 사람에게 그대로 심어 보여준다면 우린 이렇게 먼 길을 돌아가지 않아도 될 텐데. 나는 계획 중인 사업 계획과 내용을 L에게 천천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말로만 하면 이해의 한계가 있으니 눈으로 보고 알아들을 수 있도록 직접 만든 스티커 샘플도 가져갔다. 하지만 내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L은 스티커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며, 디자인 문구 업계에 대한 지식이 전무하다는 걸. 숨김 없이 말하자면, 그런 것은 무쓸모하다는 쪽에 서는 분이다.
"너, 사업 왜 하려고 하는 거니?"
"솔직하게요?"
"그래."
"솔직하게, 돈 벌려고요." 이게 진심이었다.
"그럼 나도 솔직하게 말할게?"
이때 벌써 느낌이 안 좋다. 어이질 말도 예상된다.
"이거 절대 안 돼. 아무도 안 사. 이걸로 돈 못 벌어."
"······."
아프다. 뼈 맞았네.
지금에서야 돌아보지 않아도 L의 말은 맞다. 1년 전의 나도 아마 잘 알고 있었다. 다만 회피했다. 지금 내가 할 줄 아는 건 이런 게 전부라, 소박하고 하찮지만 다른 방도가 없었던 거지. L의 말은 날카롭게 벼린 칼날처럼 가슴을 그었다. 딱 정곡을 찔린 걸지도.
그녀에게 보여줬던 샘플은 지구 여권 스티커였다. 여행과 기록을 사랑하는 나는 매번 여행을 다녀온 후, 다이어리를 꾸밀 때마다 한계를 느꼈다. 여행지의 맛을 살리는 붙일만한 괜찮은 스티커가 없군. 이것이 시작이었다. 그림도 그릴 줄 알고, 디자인 툴 다룰 줄도 알고, 시간과 노력과 돈을 쓴다면 스티커는 만들 수 있다. 모두를 만족시키지는 못하더라도 나처럼 문구와 기록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아이템이 될 거라고 믿었다. 여행러들이 좋아할 것 같아. 내 사업 아이템은 먹힐 거라는 희망. 모든 예비 창업자는 이러한 희망이 있다. 그러지 않으면 어떻게 시작할 수 있을까.
지구 여권 스티커는 내가 하나하나 직접 그린 나라별 랜드마크나 유명 관광명소를 여권 도장 컨셉으로 표현한 그래픽이다. 빈티지 스탬프 느낌을 위해 잉크가 살짝 튄 듯한 질감도 넣었다. 내가 소비자라면 구매할만한 퀄리티를 생각하며 작업했다. 이것 역시 세상의 모든 제작자의 관점이다. 해외여행의 수요가 늘고, 기록과 다꾸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트렌드를 타고 소문날 아이템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한국인이 많이 여행 가는 대륙별 8개국 해서 총 40개국을 선정하고, 3개월이 넘도록 디자인 작업을 하고, 꼼꼼히 재질까지 고른 결과물이 L의 앞에 놓였다. 시간과 정성을 쏟았지만 혹평은 찰나의 순간을 파고들어 습격하듯 날 공격했고 나는 사실 본질을 알고 있으면서 애써 외면했다.
갑작기 L의 앞에 가지런히 펼쳐둔 내 노력들을 거두고 싶어졌다. 턱을 괸 채 여기저기 가리키며 설명하는 내 손가락을 좇는 L의 눈길 앞에서 그것들을 치우고 싶었다. 보이고 싶지 않아졌다. 시간을 더 들여 이것들이 여기까지 오게 된 과정을 설명하고 싶지 않아졌다. 얼마의 시간과 브리핑이 있다 한들 결과는 뒤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내 사업 아이템을 두둔하려는 마음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L의 솔직함에는 적당히 이해 가능한 이유가 있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애초에 그녀는 개인 사업자이긴 하지만 본인의 브랜드가 있는 게 아니다. 그녀는 사입 판매자다. 중국에서 물건을 가져와 파는 형태다. 그래서 내년에 — 그러니까 올해 2025년 — 중국 직구 사이트가 뚫리면 큰일이라는 말을 했다고 엄마가 전해줬다. 브랜드를 만들어 운영하고자 하는 나와 기존 물건을 떼와 파는 L의 사업은 비슷하면서도 최초 접근 방식이 달랐다. 나에게 중요한 건 브랜드를 론칭해 잘 키워서 가치를 높이는 것이고, 그녀에게 중요한 건 당장 물건이 잘 팔리는 거다. 둘 다 최종 목적이 돈이라는 점은 명백하다. 사업의 궁극적인 목표는 돈이니까. 하지만 성장 과정의 방향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는 걸 L과의 대화가 이어질수록 알게 됐다.
"사람들이 스티커를 사나? 라벨 스티커나 택배 스티커, 네임 스티커를 사지 이런 거 사는 사람 없어."
아뇨, 저처럼 좋아하는 사람들은 사요. 스티커 종류가 되게 많다는 걸 모르시네요.
"이런 건 그냥 사은품으로 껴줘야 되는 거야. 예를 들어, 여권 케이스를 팔면서 케이스 사면 하나씩 끼워주는 거지. 그럼 사람들이 좋아하지. 여행 좋아하는 사람들이 여권 케이스를 살 거니까. 그러면서 스티커도 공짜로 주면 좋아하지."
공짜로 받는 건 뭐든 좋아할 걸요. 그리고 이건 어디 끼워 팔려고 만든 게 아니에요. 제 피 땀 눈물이 들어간 거라고요. 그 말은 조금 상처네요.
"중국 도매 사이트 알려줄게. 거기서 여권 케이스부터 떼다 팔아봐. 이건 랜덤으로 하나씩 증정품으로 주고."
안된다니까요. 절대, 절대 안 돼요.
하고 싶은 말을 속으로 꾹꾹 참으며, 찔끔 새어 나오려는 눈물을 삼키며, 욱 하고 튀어나오려는 다혈질 자아를 누르며 가만히 L의 말을 들었다. 나보다 어른이고, 엄마 친구라서 더 참았다. 전 애초에 싼 중국산 떼다가 팔려는 게 아녜요. 전 제 브랜드를 만들고 싶다고요. 중국산에 로고만 붙여 파는 건 제가 하고 싶은 게 아녜요. 사실 이렇게 와다다닥 쏘아붙이고 싶었다.
L은 친절하게도, 한자로 도배된 중국 도매 사이트를 소개했다. 똑같은 물건이 아주 저렴한 가격에 수백 수천 개 있었다. 물건은 여기서 사고, 상세 페이지는 꼭 중국어를 한국어로 바꿔 올리라는 말은 내 귀에 들리지 않은지 오래다. 우리의 관점이 너무 달라서 이러한 권유와 조언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내게 닿지 않는다. 아티클로젯을 이러려고 만든 거야? 당장 몇 푼이라도 벌린다면 중국산 사는데 네 돈 투자할 거야? 그럼 뭐부터 살 거야? 네 노력을 끼워 팔거야? 이거 네 자존심이 허락하는 일이야? 중국어로 가득한 화면을 보면서 나 자신에게 수없이 질문을 던졌다. 대답은 없다. 절대 아니니까. 내가 시도하고 싶은 일은 이게 아니야. 이건 스스로에게 너무 부끄러워. 창피해. 내가 원하는 게 아냐.
사입하는 분들을 욕하는 건 결단코 아니다. 다만, 내가 바라던 사업 방향은 아니다. 이러한 방향을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진짜 경험적 조언이 될지 몰라도 내겐 아니었다. 대학시절에 배운 디자인 원리와 그걸 적용하며 노력한 무수한 작업들은 결코 이런 걸 위한 게 아니었다. 그래서 종국에는 상처와 답답함이 남았다.
기창업자에겐 까마득할 사업자 등록 방법과 택배 계약 및 송장 붙이는 법, 스마트스토어 여는 법, 상세 페이지 올리는 법 등 기초의 기초적인 단계를 묻고 기저의 갈증이 해소된 것은 분명하다. 나를 위해 귀한 시간 내어주신 L에게도 고마움이 있다. 잘 될 거야, 일단 해봐, 열심히 준비했구나 따위의 말 한 마디 못 듣기는 했지만. 아마 나는 응원이 필요했던 것 같다. 결과가 어찌 되든 한 번 해보라는 등 떠밈이 필요했는지도.
L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꼭 성공하겠다는 당찬 포부를 남겼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또다시 많은 생각을 했다. 불만, 어느 정도의 답답함 해결, 화, 속상함, 홀가분함, 걱정 등으로 버무려진 감정들. 엄마에게도 고마웠다. 덕분에 누군가에게 뭐라도 물어봤으니. 어쩌면 환상의 핑크빛 미래를 약속하지 않아서 차라리 다행이다. 시작부터 현실을 뼈 맞은 꼴이니 예방접종 했다고 여긴다. 시작만 해도 잘 될 거라면, 개나 소나 다 사업하지 왜 아니겠어? 세상에 쉬운 일 하나 절대 없는 거 잘 알잖아.
우거진 정글에 고립된 이질적인 펭귄 한 마리가 되어 외친 SOS. 제발 누구라도 도와줬으면 했던 조난자. 스스로 항해를 마음먹었으면서도 살펴볼 지도 하나 없던 고독한 방랑자. 생애 처음 외친 구조 요청은 예상과 사뭇 다른 결과를 낳았지만 일부는 구원받았으므로 앞으로도 자주 살려 달라고 외칠 생각이다. 살려줘, 도와줘, 나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어. 이렇게 외치다 보면 어느 마음씨 좋은 배 한 척 와서 구명 튜브라도 던져주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 일단 바다로 뛰어들었다. 어푸어푸 헤엄치다 거친 물살에 휩쓸리다 그러고 있다. 아직 평화로운 섬은 발견하지 못한 채로. 그러니까 나 여기 있어, 살려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