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닥임

단단해진 마음으로

by 아인장

8월, 올해를 중심으로 내 삶을 고작 30개의 글로 담아보자 다짐했을 때 나는 그 끝에 어떤 감정이 남을지 알 수 없었다. 감정의 기복이 가장 요동치고 있다 느낄 때 브런치 작가가 되었고, 무어라도 일단 시작하자는 마음에 사업 1년 차 내 이야기를 생생한 후기글 형태로 남겨보자 마음먹었더랬다. 술술 써 내려가는 날도 있었고, 키보드 위에 가만히 손을 얹은 채 있는 날도 많았지만 나는 나 자신과 독자와의 약속을 지키며 어느덧 스물여섯 끝에 서 있다.


처음 에세이를 써보자 마음먹으며 단 1%로라도 나아진 나를 기대했던 것 같다. 진솔하게 말하자면 '안정적인' 내가 되어있길 바랐다. 나는 내가 꽤 단단하고, 의지박약 하지 않으며, 강단 있고, 인내심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냉혹하고 낯선 세상과 부딪히며 내 생각 이면의 나를 많이 발견했다. 감정이 여리고, 조급하며, 막막하고, 불안한 나. 적어도 12월 즈음에 서 있을 나는 조금 덜 흔들리는 사람이기를,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사람이길 바랐던 것 같다. 결과적으로 추운 계절의 시작점에 있는 나는 내 기대만큼 자리를 잡지도, 안정적이지 않다. 그렇지만 하나 확실한 건, 흔들려도 괜찮다는 믿음이 생겼다는 것이다. 충분히 흔들려보기 전에 흔들림을 두려워했고, 폭넓은 경험이 없으면서 새로움에 도전하는 것을 경계했다. 이제 더 늦기 전에 마음껏 부딪혀볼 필요가 있다는 깨달음이 내게 남았다.


그림을 좋아해서 디자인을 전공했고, 디자인도 좋지만 좋아하는 다른 것이 많아서 이를 모아 내 사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사업을 운영하며 내가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을 잃어버렸고 이내 방황했다. 애초에 남들 따라 언뜻 길이 나있는 곳으로 가는 것이 좋았을까 후회도 많이 했다. 길 비스무리한 곳으로라도 갈걸, 왜 애먼 수풀을 헤치고 정글 속으로 들어왔을까 자책도 했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은 내가 선택한 길 위에서 괴로운 건 나였다. 탓할 존재도 없고, 그럴 자격도 없다는 걸 알았을 땐 정말 고통스러웠다. 내가 내릴 수 있던 최선의 선택을 비껴갔을까 봐, 그래서 너무 늦어버린 걸까 봐 울기도 많이 울었다. 올봄의 나는 많은 위로가 필요했다.


가만히 있기만 할 수는 없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으앙 징징거릴 수는 없어 이 매서운 세상에서 살아남을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과 일단 해볼 수 있는 것들을 고민하고 일을 벌인다. 지금 쓰는 이 글도 그러한 해결책 중 하나였다. 글 읽기와 쓰기를 좋아하는 내가 해보고 싶었고 해 볼 가치가 있는 일이라 판단했다. 그렇게 일주일에 두 번, 몇 없는 독자와의 약속을 지키며 네 달이 지났다. 사실 근본적으로는 나 자신과의 약속이었지만.



세상에 나와 아티클로젯이 있다 발버둥 치는 일의 첫 시작은 내가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을 찾는 것이었다. 우연인지 잠깐 곁에 머문 신이었는지 어느 날 찾아온 드로잉 클래스 손님과 5일 간 꼬박 그림을 그리며 오래전에 떠난 집을 찾았다. 아주 어릴 때 그림 그리기를 좋아한다는 걸 알았는데, 그걸 나 몰라라 하고 '내가 좋아하는 게 분명 있을 거야' 상상하며 세상으로 여행을 떠났다. 한참을 헤매어도 진실로 좋아하는 걸 찾지 못해 훌쩍일 때, 그 손님과의 만남을 계기로 내가 정말 좋아하고 깊이 해보고 싶은 게 그림이라는 걸 깨달았다. 원래부터 거기 있던 것, 내 가장 오래된 집.


"감사해요. 덕분에 제가 정말 그림을 좋아한다는 걸 다시 알았어요."

"선생님, 이렇게 좋은 재능 썩히지 마세요. 그림 더 자주 그리시고, 이것저것 그려보세요. 이왕이면 물감 쓰고 그냥 손 가는 대로 슥슥 그리면서요. 계속 그리세요, 계속요."


두현 님, 잘 지내시죠? 저 유명해지겠다고 약속했었는데. 매일 조금씩 노력하고 있어요. 어느 지하철 역 지하에서 혼자 그림 그리던 젊은 애, 아침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건배하며 그림에 대한 생각을 나누던 선생님. 제가 당신에게 어떻게 기억되거나 남을지 모르겠지만, 머지않아 더 큰 사람이 되어있겠다고 약속하겠어요.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당신은 분명 제 귀인이십니다.


여러 번의 탈락과 거절, 고독, 우울을 건너 지금의 내가 되었다. 여전히 가슴 한편은 새로운 도전이 두렵고 걱정이 앞서지만 그러기엔 내게 남은 시간이 너무나 아깝다는 걸 깨달았다. 어린 내가 꿈꾸던 나를 만들어볼 기회와 용기는 오롯이 나에게 있다는 걸 진정으로 안다. 다음에, 내년에, 나중에 하며 미루었던 모든 것을 내년에는 해볼까 한다.


솔직하게 지하에 있던 용기가 바닥 뚫고 하늘을 향해 솟구치도록 만들어준 것이 그토록 환멸 느끼던 지하에서의 생활이라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사람은 해를 보고 살아야 한다는 걸 절실히 알게 해 준 2025년. 나를 중심으로 화면을 줄이고 또 줄이고 더 줄여서 지역 지도가 서울 지도가 되고, 서울 지도가 한국 지도가 되었다가 아시아 대륙의 한 구석까지로 작아진다고 가정하면 나는 너무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과감했다고 생각한 모든 것들, 실패했다고 생각한 모든 것들이 얼마나 하찮은지 알게 된다. 그렇게 작은 점보다 작은 나는 남은 내 시간을 정말 행복하게 살고 싶다. 더 이상 우울하고 싶지 않고, 외롭고 싶지도 않다. 젊음이 허락하는 만큼 무모해지고 싶다. 그래봤자 작은 점인걸? 손가락 한 마디로 가리기에도 과분할 만큼 작은 나를 생각하면 머뭇거리지 않을 이유가 없다. 뭐든 해보고 싸우고 실천하고 싶다.



완벽하게 안정적이지 않은 내가 있다. 그렇지만 좀 더 단단해진 내가 있다. 모두가 날 좋아할 수 없듯 모두가 내 브랜드를 좋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 내가 있다. 후회하고 부정하기엔 너무 이른 내가 있다.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하다는 어른들의 말씀을 믿어보기로 한 내가 있다. 이 마음과 자세를 갖기까지 많은 이야기를 품은 내가 있다. 삶은 태도에 달려있다고 생각하는 내가 있다. 나는 이 모든 나를 토닥이고 싶다. 따스하게 안아주고 싶다. 수고했어, 앞으로 더 고생스러운 일도 많겠지만 그래도 잘 해낼 거야. 다소 웃픈 조언을 건네고 싶다. 막연한 희망보다 확실한 충고가 나으니까. 적어도 와당탕탕 한 해를 버티며 처음보다 단단해진 나니까 가벼운 토닥임으로도 충분히 잘 해낼 수 있을 거라고, 나는 그렇게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