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협이 홍명보를 차기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내정했다는 소식이 나온 후, 많은 축구팬들이 분노하는 것 같다. 축협이 그동안 외국인 감독을 데려올 것처럼 정보를 흘렸기 때문에, 선진 축구를 경험한 탄탄한 커리어에 전술적 역량까지 갖춘 외국인 명장이 올 거라고 기대한 이들도 많았던 것 같다 ("클롭급 감독")
그러나 정몽규 회장에 대한 기대치가 낮은 이들은 애초에 그러한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축협이 클린스만을 감독에서 경질하면서 위약금 조로 막대한 지출이 발생하였으므로 신임 감독을 외국인 명장으로 데려오려면 정몽규 회장이 사재를 출연하는 수밖에는 없는데, 정몽규 회장의 지난 행보를 돌이켜보면 한국 축구를 위해 그 정도의 희생을 감수할 인물이라고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차기 국대 감독으로 국내 감독, 심지어 홍명보를 감독으로 앉힐 것으로 예측한 이들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정몽규 회장이 클린스만을 선임하고 경질하기까지 평지풍파를 겪었기 때문에, 설마 이번에도 그러한 주먹구구식 행정을 하리라고는 차마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정몽규가 결국 그 어려운 일을 해낸 것이다.
그래도 축협이 한 해 1800억 원이 넘는 예산을 집행하는 곳이고, 그 재원으로 스포츠토토 지원금(225억 원)과 국민체육 진흥 기금(108억 원)과 같은 공적 기금이 포함된 나름 공적인 기관인데, 이렇게 주먹구구식으로 업무를 처리할 수 있을까. 뭔가 우리가 모르는 불가피한 사정이 있지 않을까?
축협의 입장을 나름 선해하려고 해도, 국가대표전력강화위원으로 참여했던 박주호의 발언을 들어보면 도무지 축협을 옹호하기 어려워 보인다. 박주호의 말에 따르면, 국가대표전력강화위원회는 처음부터 국내 감독 선임을 염두에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주호는 유럽에서의 활동을 바탕으로 여러 외국인 명장을 섭외하여 후보 명단에 올렸으나, 전력강화위 내부에서는 박주호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던 것 같다. 개중에는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임시 감독직을 노리는 이도 있었다고 한다.
사실 우리나라 기관들 내부 위원회라는 곳들 중 대강 구색 잡기 식으로 운영되는 경우가 많다. 위원들도 알음알음 인맥으로 구성해놓고 회의를 개최하더라도 대강 형식적으로 토론한 뒤에 적당히 결론을 내리고 끝낸다. (물론 그 결론은 이미 기관에서 정해놓은 것.) 그렇다면 위원들은 그런 허울뿐인 자리에 왜 시간을 내서 참석하는가? 이력 쌓기에 좋으니까. 그런 와중에 전혀 예상치 못하게 박주호가 진심을 다해 열심히 외국인 감독 후보도 조사해 대안으로 제시하니 '주류' 위원들은 당황하지 않았을까. 축구계는 특히 선후배 간 위계질서가 엄격하니 계급장 뗀 수평적 토론 같은 건 원시적으로 불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박주호는 오늘 상당한 각오를 하고 폭로한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 축협 주류가 물갈이되기 전까지는 축협에서 목소리를 내기 어렵지 않을까.
앞서 축협의 의사결정구조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면서 국가대표전력강화위원회의 업무는 이사회의 승인을 받아야 하고, 이사회는 정몽규 회장의 거수기 역할에 그칠 우려가 있다는 점을 우려했는데,
국가대표팀 감독은 국가대표전력강화위원회의 소관 업무이다.
국가대표전력강화위원희의 소관 업무는 이사회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이사회의 승인은 이사회 결의로 이뤄지며, 재적 과반수 출석 및 출석 과반수 찬성으로 의결된다.
이사회는 회장, 부회장, 전무이사, 이사로 구성된다.
부회장 및 이사는 회장이 추천한 자 중에서 총회에서 선임한다.
알고 보니 지금 국가대표전력강화위원회 자체가 주먹구구식으로 일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점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2천억에 가까운 예산을 쓰고, 수백억의 공적기금이 투입되고, 전 국민의 관심과 사랑이 집중된 국가대표팀의 운영을 총괄하는 기구가 이렇게까지 날림으로 일 처리를 하고 문제가 생겨도 그저 버티면 그걸로 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