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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폭 가해자가 과연 몇몇 소수에 불과할까

왕따가 무서운 것은 학교 학생 전체가 적이 되는 경험 때문입니다.

by 이이진

한 번 드라마를 보게 됐더니 요약본 같은 거를 보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요즘엔 글로리라고 학폭 관련 드라마가 있길래 내용을 한 번 좀 봤습니다.


현재는 학폭이고 제 때는 왕따였던 이 문제를 실제로 당하게 되면, 드라마에서처럼 특정 인물 몇몇이 괴롭혀서 괴로운 것만이 아니라 반 전체 혹은 전교생이 나를 무시하기 시작한다는 데서 실질적인 공포가 시작됩니다. 그 인물 몇몇은 대부분 반 전체 혹은 전교생 모두를 대변하는 것뿐으로, 이들만 피하면 된다는 생각은 진짜 왕따를 안 당해본 사람이 할 수 있는 사고 구조 같고요. 어제까지 과자를 나눠 먹던 친구가 오늘은 말대꾸를 하지 않고, 그제까지 집에 같이 가던 친구가 오늘은 뒤통수에 지우개를 던지는 상황. 그리고 주요한 몇몇은 이 타이밍을 앞세워 강도를 높이죠. 일부는 불편해 하지만 그렇다고 나설 정도로 분위기를 바꿀 힘이나 용기는 없고, 일부는 왕따 피해자의 태도에도 문제가 있다고 봐서 딱히 원치 않는 중립이 될 수 있을 뿐입니다. 하루 종일 화장실도 못 하게 막혀본 경험을 하고 나면, 학교는 학교가 아니라 생존터로 변하죠.


학교생활이 생활의 전부인 당시 학생의 입장에서 누가 언제 나를 공격해 올지 모른다는 극한의 공포는 살아남기 위해서 못 하는 짓을 없게 만들거나 반대로 모든 걸 받아들이게 만듭니다.


그렇다면 왜 알리지 않는 걸까요?


왕따 피해자가 된다는 것은 어디에도 구원이 없다는 것을 각성케 하는 것부터가 시작힙니다. 위에 언급했다시피 어제의 친구가 화장실 앞을 막고 서있는 상태. 그렇게 화장실도 이용하지 못 한 채 자리로 돌아오면 그중 대표 몇몇이 입구에서부터 시비를 걸기 시작하죠. 그런데 여기서 누구에게 도움을 청하죠? 저런 상황에서 반 친구 누가 제 편을 들어줄까요?


딱히 누굴 두둔할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드라마 글로리처럼 이렇게 도식화한 왕따 설정은 진짜 왕따, 학폭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작가의 이분법적인 사고 같아서 저는 좀 불편하더군요.


드라마처럼 실제 적이 몇몇에 불과하다면 아마도 많은 왕따들은 사회인이 되어 어떻게든 극복하거나, 드라마 속 동은처럼 복수를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누구보다 그 상황에서 가장 벗어나고 싶었던 게 왕따 피해자 자신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 상황에서 가장 먼저 잊으려 노력하는 사람도 왕따 피해자가 되죠. 그게 복수로 이어지기 힘든 이윱니다.


개인적으로 작가 또한 학창 시절을 보내면서 학교에 왕따가 없었다고 하면 굉장히 좋은 학교를 나온 터라 과연 왕따 피해자의 심리를 이해할까 의문이 들고, 만약 있었다면 가해자 혹은 피해자 혹은 방관자였을 거기 때문에, 그 문제에서 뭔가 자신만은, 객관적인, 시점으로 묘사하는 건 좀 불편하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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