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부한 날과의 사투 7
“그러니까 당신이 내게 말을 걸었기 때문이라구요. 만약 말을 걸지 않았다면 우리는 만날 필요가 전혀 없는 관계잖아요. 그게 당신을 편하게 만들고 있는 거죠. 여기서, 일어 서서 손을 흔들고 나가면 안녕 이니까 말이죠. 다시 볼 필요 따위 없잖아요.”
“다시 보게 되면 어떨까요?”
그가 떨궜던 고개를 들며 물었다.
“다시 보게 될수록, 다시 봐야 될수록 관계에 솔직해지기 힘들잖아요.”
내가 말했다.
“그건 왜죠?”
“실망하고도 싶지 않고, 실망 주고도 싶지 않고, 그러다가 결국 실망하게 되면 불편해지니까요. 당신과 나는 실망할 관계도 아니고 멀어질 관계도 아니예요. 실망이라는 건 기대가 있으니까 일어나잖아요. 당신도 나도 오늘 이렇게 여기서 만날 거라는 기대가 전혀 없었으니까 실망하지 않는 거예요.”
정말 그랬다. 기대하면 실망이 왔다. 실망하면 관계는 초라해졌다. 구차해졌다. 그게 싫어서 실망시키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관계에서 노력이란 건 하면 할수록 결국에는 아무 것도 남기지 않았다. 어떤 관계든 그 관계의 끝엔 허무함만 있었다.
차라리 마음의 끝에 미움이 남아 있을 때는 살아 있는 것 같았다. 미움이라는 감정이 살갗을 파고 들어 심장을 뛰게 할 때는 적어도 그 며칠 밤만큼은 그런대로 살아있다는 것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다. 미워하니까 잘 살아주겠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작은 일 하나에도 최선을 다할 수 있었다. 정말 무서워지는 순간은 오히려 최선을 다한 후에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은 내 안으로 침잠해야만 할 때였다.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은 공간에서 내 마음 조차 갖고 있는 감정이 아무 것도 없음을 느끼게 될 때, 미워하는 순간조차 잃어버린 그 순간이 나는 무섭도록 싫다.
그리고 정말 관계의 끝이 허무함뿐이라면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 되는 건가 궁금했다. 그리고 여전히 관계에 충실한 사람들은 아직까지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건지도 궁금했다. 물어도 대답해 줄 사람 없는 질문이지만.
침묵이 흘렀다.
그도 나도 한 참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 속에 있었다. 고개를 돌려 자세히 보았다. 그가 울고 있었다. 순한 양처럼 침대 위에 웅크리고 누워 텔레비전 어느 화면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로.
침대 위에 쭈그린 채 몸을 숙이고 누운 그는 나보다 작아 보였다. 자주색 니트로만 뒤 덮인 그의 등이 심장처럼 보였다. 가끔씩 숨 소리를 내며 들어 올려졌다가 다시 주저 앉는 그의 어깨를 다가가 만져 주고 싶었다. 아무 감정 없이 어루만져 주고 싶었다. 그렇게 하고 싶은 여유 같은 게 남아 있다는 게 놀라웠지만.
“바닥을 보고 있었어요.”
하지만 나는 다가가는 대신 말을 했다. 가장 안전한 방식의 소통. 하고 싶은 말은 감추고 하고 싶지 않은 말로 상대방과 시간을 보내 행위.
그가 고개를 돌렸다.
“구걸을 할까 말까 망설였는데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는 가족도 없고, 친구도 없고, 경제관념도 없고, 그러다 보니까 특별히 내일을 준비해야 할 이유도 없거든요. 그런 내가 당장 살아야 할 이유가 뭘까를 생각했는데 그건 쓰레기가 되고 싶지 않다는 아주 간단한 거였죠. 쓰레기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고 돈은 필요하지만 내가 팔 수 있는 건 나 자신 뿐이고 그래서 구걸을 했어요. 내가 타인에게서 받을 수 있는 게 동정이란 감정 밖에 없을 텐데 그렇다면 그 동정심을 이용해서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