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부한 날과의 사투 8, 9 - 자작소설

이어지는 내용이라 같이 올려요

by 이이진

진부한 날과의 사투 8


“돈은 벌었나요?”


그가 침울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뇨. 당신을 만나기 전까진, 정말 무일푼이었어요.”


“그렇군요.”


그의 목소리가 쓸쓸하게 들렸다.


굽은 그의 등에 나의 등을 기대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머릿속으로 내면이 말을 걸어 왔다.


위험한 일이야.


이미 나도 알고 있다. 적어도 관계가 불편해지리란 것을. 하지만 위험해질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그렇게 위험한 일일까?

당연하지.


마음의 소리가 귀 밖으로까지 나올 뻔 했다.


왜 그게 당연한 거야?


개미 같은 목소리로 내가 다시 물었다.


그가 도망 칠 테니까.


“도망을 왜 쳐? 위로해 주려는 것뿐인데.“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입 밖으로 소리가 튀어 나왔다.

그가 움찔 하면서 고개를 돌렸다.


“뭐라구요?”


“아니요. 혼잣말이예요.”


나는 그를 위로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가 필요로 하는 위로는 그와 내가 아무런 관계가 아닌 시점에서 시작되어 결국 관계가 맺어지지 않는 시점에서 끝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내가 그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위로를 받는다. 내가 필요한 방식으로 그를 위로하는 것은, 그가 필요로 하는 위로가 아니다. 필요로 하지 않는 위로는 강요와도 같다.


기분이 가라앉으면서 머릿속 생각들이 제 위치를 찾아갔다. 억누르려 해도 억눌러 지지 않는 생각들. 누군가는 그걸 불안이라고도 부르는 것 같다. 불안, 인 걸까. 나는 불안해 하고 있는 걸까. 점점 내 안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나는 알고 있다. 누군가를 만나고 싶지 않은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늘 누군가를 원해왔다는 사실을. 따뜻하게 위로 받고 사랑 받고 싶었다는 사실을. 어쩌면 그 관계를 너무 원해 왔기 때문에 결국 포기해버리고 말았다는 사실도. 다만 언제나 헤어지는 것이 싫었다. 헤어지는 것이 두려워서 만나는 일을 피해 왔다. 누군가와 헤어진다는 것은 내 안의 불안과 만난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에.


누군가를 만나고 나면 내가 그 사람을 받아들일 수 없는 만큼, 그도 나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사실이 힘들었다. 그 거리는 쉽게 좁혀지지 않았다. 아무도 없을 때는 생기지 않는 거리가 누군가를 만나면 생겼다. 그리고 거리가 좁아질수록 넓어질까 불안해졌다.


헤어지면 완전히 멀어지게 될 거라는 불안감. 결국 이 불안을 해결하는 길은 영원히 헤어지지 않는 것 밖에는 없었다. 그러나 만남에는 언제나 헤어짐이 존재한다. 헤어지기 싫어서 만나는 것도 싫은 나 같은 사람은 헤어지는 걸 피하기 위해 만남 자체를 피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나의 이 생각을 누군가 만날 때마다 설명해야 하는 게 싫다. 당신을 좋아하지 않아도 혹은 좋아해도 그 여부와는 상관 없이 단지 헤어지는 게 싫은 거라고. 헤어지는 게 너무 싫다는 말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계속 이렇게 있을 건가요?”


울음이 나오는 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그가 웅크렸던 몸을 일으켜서 침대 위로 조용히 다리를 내려 놓았다. 아이가 어른이 되는 것처럼 그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내려 놓은 다리를 살짝 주물렀다. 감각을 확인하듯이. 다음에는 리모컨을 눌러 텔레비전을 껐다. 침대 시트를 정리하고 원래의 자리로 흐트러진 물건들을 옮겼다.

마치 그와 내가 함께 이 방에 있었던 적이 없었던 것처럼.


진부한 날과의 사투 9


집으로 돌아와 보라색 소파에 누워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을 리 없는 높은 천장을 힘없이 바라 보았다. 손이 닿지 않은 탓인지 오히려 천장이 자신을 뻗어 날 바닥으로 눌러버리는 것 같았다. 몸이 소파에 붙어버렸다. 소파와 하나가 된 것처럼 아무 힘도 쓸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눈을 감았다. 눈을 감고 그가 나를 차에 태웠던 그 순간으로 돌아갔다.


그는 나를 차에 태우자마자 클래식 음악을 틀었다.


그가 돌아갈 준비를 하는 거예요, 라고 말했다. 다시 그 거짓을 말해야만 하는 세계로 돌아갑니다, 라고 낮고 차가운 목소리로 그는 그 말을 여러 번 내뱉었다.


“그 세계에서의 저는 클래식을 좋아하죠. 제법 우아한 성격의 사람입니다. 가랑이 사이에 얼굴을 들이밀고 웃는 짓 따윈 하지 않아요.”


“해 줄 말이 없어요.”


내가 말했다.


“나도 듣고 싶지 않아요. 들으려고 말하는 게 아니라 말하고 싶은 걸 말하는 것뿐이니까요.”


그가 다시 후후, 웃었다.

“돌아가고 나면 다시 이렇게 하고 싶은 말을 하게 될지 어떨지 모르겠어요. 결국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말이 어떻게 있는 건지도 알 수가 없고요.”


“한다고 해서 잘못될 건 없잖아요.”


“알아요. 그렇다고 그게 쉽다는 건 아니고요.”


“우린 뭘 한 건가요? 뭘 했다고 생각해요?”


“뭘 하다니요?”


“이렇게 차 안에 있으니 마치 조금 전 모습이 현실이 아닌 것만 같아서요. 그 안에서의 모습이 현실이라면 말이죠. 지금의 우리는 거짓이 되죠.”

“그러니까 이제는 잊는 거죠. 모조리, 당신과 나의 원래는 없었을 그 시간으로 돌아가 모조리, 깨끗이, 지우는 겁니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하죠? 그거?“


사실 그가 내게 바라는 잊는다는 행위 자체도 아무 쓸모가 없다는 말을 하려다가 관두었다. 나는 그 말도 쓸모가 없다는 것까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멈추지 못할 일은 하지 않는다. 바닥 위로 올려 놓은 선 위에서 외줄을 타듯 흔들거려도 바닥으로부터 10센티미터도 올라가 있지 않은 그 안전한 선 위에서 흔들릴 뿐이다. 나는 그 선을 더 높이 올리기 위해 바닥에 무릎을 꿇고 구걸을 했지만 그는 그런 내게 돈을 주는 것으로 올려지던 선을 바닥으로 안착시켰다.


선이 바닥에 내려진 순간 현실로 돌아왔다. 동정심에서 돈을 벌어보겠다던 나의 결심은 순간적인 자기기만에 지나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내가 얻으려던 것은 뭘까. 바닥으로 내려갈 수 있음을 각인하는 정도에서 다시 돌아올 수 있음을 확인하려던 것일까.

어쩌면 그가 내게 하려던 말도 나만큼이나 어려운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단지 나보다 빨리 그 사실을 받아들여 무리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까지도 알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바닥까지 내려가 부셔질 수 없다. 그리고 그는 나만큼도 내려오질 못한다. 그도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너무 잘 알고 있기에 자기보다 좀 더 바닥에 있는 날 구제하는 것으로 순간이나마 진부함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돌아왔다. 이렇게. 아무 일도 아닌 일을 아무렇지 않게 해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채로. 그 작은 균열조차 견딜 수 없는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으로서. 구걸은 결국 내 인생 최악의 해프닝이 될 것이고 아마 그는 그런 나와 대화를 나눈 것이 그 인생 최고의 해프닝이 될 것이다.

그와 나는 벌써 이렇게 다른 시작을 갖는 것이다. 느끼는 진부함은 너무나도 같은 것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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