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부한 날과의 사투 10
모처럼 봄답게 날씨가 화창했다.
모아둔 돈은 여전히 없었지만 적어도 감정이 우울이라는 극단을 향해가지는 않았기 때문에 나는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쉬지 않고 할 수 있었다. 때로는 그 날의 극심한 우울함이 현실이 아닌 것만 같았다. 먹고 사는 데 있어서까지 남에게 신세 지고 싶지 않다. 사는 이유라는 게 단지 타인에게 피해 주고 싶지 않아서라니. 비참하긴 하지만 그건 정말 사실이었다. 때론 나 스스로를 위로하기를, 나는 아무 것도 갖고 싶지 않기 때문에 모든 걸 다 가질 수도 있다는 생각도 했다.
나는 내가 지나쳐 보내는 그 많은 사람들 속 한 명처럼 그냥 지나쳐 보내버리고 마는 한 명의 지나가는 사람이 또한 나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이걸 인지하고 있는 한에는 내 자신을 과장해서 받아들이거나 비하시키지 않을 수 있다는 것도 안다. 아무도 믿지 않겠지만 적어도 이렇게 가진 것이 없을 때의 나는 갖고 있을 때의 나보다 강하다. 갖고 있는 자들은 절대 알 수 없는, 놓아버림의 자유를 나는 알고 있다. 비록 나 혼자만의 자유라고는 해도 내가 좋다면 그걸로 만족한다.
음악을 들으면서 그렇게 어떻게든 스스로에게 집중하면서 거리를 걸을 때였다.
이제 막 결혼식을 마친 일련의 사람들이 도로를 점령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무리들 속에 그가 있었다. 말끔하게 양복을 걸친 채 편안한 표정으로 즐겁게 대화를 나누는 무리 속에서 분명하게 그가 보였다. 내가 그를 인지했을 때, 그가 나를 전혀 기억해내지 못했다. 스치듯 눈이 마주쳤지만 마주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것 같았다.
나와 함께 있었던 그와는 분명 다른 그가 즐겁게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가 말했던 것처럼 어색하고 불편한 대화를 나누는 상태로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나와 함께였을 때의 모습이 그답지 않아 보일 정도로 행복해 보였다.
왜 그는 저렇게 행복한 모습을 하는 자신을 볼 수 없는 걸까. 지금 자신이 사람들 속에서 너무나 즐겁게 웃고 있다는 것을 왜 그는 알지 못하고 내 앞에서 음울한 표정을 지었던 것일까, 궁금했다. 자기 얼굴을 매 순간 볼 수 없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불행이지 않을까. 지금의 모습을 그가 본다면 다시는 내 앞에서 혹은 또 다른 누군가를 찾아가며 자신이 자신답지 않다는 말은 하지 않을 텐데.
그러다가 문득, 그가 나를 알아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정이 생겨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바로 그 때였다. 내가 그를 만나고 싶지 않은 이유는 감정 중에서도 가장 견디기 힘든 ‘후회’가 나를 언습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후회라는 감정은 떨쳐내기가 쉽지 않다.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는 이미 후회라는 감정이 생겨버린 뒤였다.
뒤돌아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는데 누군가 내 어깨를 툭 하고 쳤다. 뒤 돌아 보니 그였다. 아는 체 하지 않기로 하지 않았냐고 물으려다가 말았다.
“망설였는데 아는 체 하기로 했어요. 지금도 그렇게 힘들지는 않죠?”
그가 웃으며 말했다.
“네. 그 날은 저도 제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아르바이트도 하고 있어요. 이 근처에는 일이 있어서 잠깐 들린 거예요.”
“그렇군요.”
“못 알아본 줄 알았어요.”
“알아봤어요. 멀리서부터.”
“정말요?”
“말했잖아요. 누구도 내 생각을 모른다고요. 알 수 없게 한다고요. 내가 먼저 알아봤어요. 전혀 눈치 채지 못했죠?”
그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그리고 눈빛 깊은 곳에 스치듯 여관에서 봤던 음울함이 있었다.
“즐거워보였어요.”
“즐거워요. 그런데 또 다른 게 언제나 있는 거예요.”
“왜요?”
“진부하니까요.”
“네?”
“자기가 그어 놓은 선을 안다는 것은, 그 선을 그을 때 이미 넘을 수 없는 선은 긋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거든요. 그러니 진부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 그걸 깨고자 했던 순간의 사투조차도 진부하고 이미 한계를 가지고 있는 거죠.”
그가 웃었다. 나는 그 웃음에 가벼운 목례로 답했다. 그리고 다시 만날 일 없는 사람처럼 혹은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처럼 서로의 연락처 따위는 묻지 않았다. 그가 다시 무리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나는 그런 그를 등지고 횡단보도 앞을 향해 묵묵히 걸어갔다.
마지막으로 내가 그에게 제대로 된 위로를 해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을 주었으니 내가 그에게 받은 돈 몇 만원에 신세 지는 기분이 더는 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어제 있던 곳에 오늘처럼 당연하게 내일도 있을 것이다.
단지 바닥과 시작이 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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