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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엔 다양한 관계를 경험하는 것도 필요는 해요

꼭 그게 모든 아동에게 필요하다고는 못 하겠지만

by 이이진

https://youtu.be/yNWm1 EI_q38? si=eCYwgHsv9 tnIqgY4

학창 시절에 두루두루 잘 친하게 지내라는 말을 하는 이유는 아직 어리기 때문에 굳이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배척하기보다는 그런 아이라고 하더라도 어떻게든 원만하게 관계를 유지하는 능력을 키워라는 의미라고 보면 될 겁니다. 성인이 되면 인간은 어느 정도 자신만의 성격, 특징, 습성, 사고의 방식 등이 고착되고,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호불호가 생기면서 선호라는 개성이 생깁니다. 아이라는 건 그런 개성이 자라는 시기로서 굳이 이걸 미리 고착하진 말아라, 이 정도의 의미인 거죠. ^^


따라서 어른들은 보통 아이가 특정 음식만 선호할 경우 억지로라도 다른 음식을 먹인다거나 (야채를 안 먹으면 좋아할 때까지 먹이는) 방식으로, 너무 일찍 특정 선호도가 생기지 않도록 압박하는 경향이 있으며, 이 과정에서 선호가 일찍 자리를 잡은 아이들은 저항이 거세게 되는 거죠. 고기만 먹으려고 한다거나, 수학 문제만 풀려고 한다거나, 게임만 하려고 하는 아이 등등이 있다고 할 때, 통상적인 부모 입장에서는 이런 경향에 아이가 너무 일찍 매몰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죠.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라서 아이가 너무 한 친구만 좋아한다거나 너무 한 친구를 증오한다거나, 아예 인간관계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경우, 너무 어릴 때 자신을 그 안에 가두기보다는 가능하면 다양한 인간 경험을 가져라, 이 맥락입니다. 그렇게 다양한 경험을 한 이후에 갖는 성격과 너무 협소한 경험으로 만들어진 성격의 위험성을 어른으로서 알려준다는 개념이랄까요? 고기도 먹어본 놈이 맛을 안다고 인간도 아무래도 다양한 경험을 한 놈이 잘 알지 않을까, 이런 통념의 연장선이죠.


물론 아이 중에도 납득할 수 없을 만큼 못된 아이들이 있긴 합니다만, 통상은 아이들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인식이 있기 때문에, 아이가 다소 나쁘더라도 개선하여 좋은 인간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의식이 있다 보니까, (오은영 선생님이 주장하는 게 세상에 나쁜 아동은 없다, 고쳐진다, 아닌가요?) <그런 친구를 배척하기보다는 좋은 쪽으로 이끌어라>가 아무래도 교육 방침이 되는 거죠. 때문에 <싫고 불편해도 미리부터 배척부터 하지 말고 잘 지내는 방법을 배워라>, 이런 개념일 겁니다. 아동 시절 친구에게 못된 짓을 배우면 어른들이 혼내고 끝날 일이지만, 성인이 돼 못된 친구에게 못된 짓을 배우면 감옥에 가므로, 아동이 두루두루 잘 지내는 것과 어른이 두루두루 잘 지내는 건 당연히 차이가 있는 거고요.


말씀하시는 것처럼 친구와 동급생은 다른 거지만, 친구를 소중히 여기는 것과 나와 다른 사람을 불편해하지 않고 적당한 거리를 두고 생활을 하는 것도 중요한 겁니다. 즉 학급 동료 모두를 친구로 만들기 위해 억지로 노력하는 불편한 경험을 쌓을 필요까지는 없으나, 불편한 학급 동료를 배척하지 않고 원만히 지내는 연습은(?) 오직 학창 시절에만 경험해 볼 수 있긴 한 거죠. 아시겠지만 어른인 채로 불편한 사람과 원만히 지내는 연습을 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고 (어떤 성인이 나를 위해 연습 대상이 돼줄까요? 서로 불편해서 불가능합니다.) 이런 연습은 오직 학창 시절에만 가능하다는 게 제 개인 경험입니다.


저도 학창 시절을 잘 보낸 사람은 아니고 나름 잘 지냈다가 오히려 왕따도 당하고 이후에는 문제아로 전락하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경험이 없었더라면 성인이 된 후 곤란했을 상황이 더 많았다고 생각합니다.


어려서 다양한 인간관계를 맺고 (맺어서는 안 되는 나쁜 사람들도 많이 봤고), 실패하고, 고통받고, 또 제가 고통을 줘봤기 때문에, 저라는 인간이 가진 한계도 알고 남이 가진 한계도 인정할 수 있게 됐고요, 이거는 돈 주고도 얻을 수 없는 경험 그 자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학창 시절에 인간관계가 너무 고통스러워서 여기 적을 수 없는 끔찍한(?) 행동도 많이 했는데 이거를 부모님을 비롯해서 선생님 등 어디에도 토로할 데도 없었던 터라, 어떻게든 스스로 극복하기 위해 발달시킨 여러 기제가 있는데, 가끔 이 기제 덕분을 볼 때가 있습니다. 최근까지도 너무 고통스러운 일들이 많은데 만약 제가 이런 기제를 터득하지 않았더라면 굉장히 끔찍한 결론에 이르렀을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


사설이 길었는데, 굳이 반 아이들 모두를 친구로 만들기 위해 억지로 성격을 바꿀 필요까지야 없겠지만, 맘에 드는 아이를 자신의 친구로 만들어서 소중히 대하는 방법과 함께 반 아이들의 각기 다른 개성을 불편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연습은 학창 시절에 해보는 게 낫겠다고 설명하면 좋을 거 같습니다. 무인도에 독거인으로 살 게 아니라면 인간은 항상 자신과 다른 인간들을 상대하면 살아야 하는데, 그걸 배울 수 있는 효과적인 시기는 학창 시절이라는 걸 알려주면 아이들도 인간관계로 인한 스트레스가 좀 완화되지 않을까요? 그렇더라도 뭔가 본질적인 기질은 잘 안 변하기도 합니다만.


어려서부터 재능을 인정받아서 불필요한 관계에 소모되지 않고 성공하는 사람들도 있긴 합니다만, 또 어떤 경우는 그렇게 자라서 결과적으로 잘못된 인간을 만나거나 다른 사람을 이해할 줄 몰라서 모든 게 무너지는 경우가 왕왕 있고 하니까, 어느 쪽이 정답이라고 할 수는 없겠는데 (저도 또 가끔은 그렇게까지 고통받지 않았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싶을 때도 있으니까요^^;;;;) 그래도 다양한 경험을 하는 쪽이 낫지 않을까 생각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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