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의 다른 이름, 성장>
한 달에 2권 정도 회사의 복지 혜택을 받아 책을 꼭 산다. 소설이나 잡지를 살 수도 있지만 나만의 기준은 있다. 내가 일을 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책으로 선정해서 2권씩 신청한다. 나 말고도 회사의 누군가는 읽고 도움이 되겠지 하는 생각에서 그렇게 신청하고 있다. 이번 책은 특히 내 의도와 딱 맞는 책이었다. 제목부터 맘에 들었다. ‘이기적 직원들이 만드는 최고의 회사’.
이 책은 스타트업을 소개하는 유튜브 채널 ‘ㅌㅇ’에서 화제가 된 에어비앤비 출신 엔지니어의 책이다. 저자는 우리나라 대기업 구조와 실리콘 밸리의 스타트업을 비교한다. 나는 한국의 실리콘 밸리라고 불리는 판교의 스타트업에 몸담고 있지만 대기업에 다녀본 경험이 없기에 업무 방식에서 어떤 차이가 있는지 궁금했다. 책을 읽으면서 내가 왜 일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열정적으로 일하는지, 왜 일할 때 보람을 느끼는지, 뛰어난 동료가 내게 어떻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지 대해 알 수 있었다.
누군가의 꿈이 월급을 받기 위해 회사에 충성하는 것이라면 그런 사람을 뽑을 이유가 없다. 그저 최소한으로 일하고, 잘리지 않기 위해 안정적인 선택만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사람의 꿈이 회사에서 많이 배우고 성장해서 몇 년 후에 다른 회사로 옮기는 것이라면 그는 자아실현을 위해 항상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적극적으로 일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기적 직원들이 만드는 최고의 회사中
나는 자소서 지원 동기에 ‘회사에서의 경험을 훗날 내 사업을 하기 위한 발판을 삼고 싶다’라는 포부를 쓰고 서류 전형에 합격했다. 또한, 최종 면접에서 이런 배짱좋은 질문을 하기도 했다. “10년 뒤 회사의 목표에 대해 대표님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그 당시에 내가 대기업 면접 전형만 가면 똑 떨어진 이유라고 볼 수 있겠다.) 입사 후 첫 점심 자리에서 대표님이 해 주신 말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3년 뒤에 어느 회사든지 골라 갈 수 있는 인재가 될 수 있도록 주전으로 뛸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겠다.’ 갓 입사한 신입사원에게 할 수 있는 가장 파격적인 말이 아닐까? 오래오래 함께했으면 좋겠다는 공허한 격려가 아닌 담백하지만 현실적인 바람이었다.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기에 나 같이 이기적인 동기를 가진 사람을 채용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당시에 대표님이 약속했던 ‘주전으로 뛸 수 있는 환경’이 어떤 환경인지 구체적으로 몰랐지만, 이 책을 보면서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었다.
입사 후에 내가 맡는 프로젝트의 의사결정자는 나였다. 프로젝트를 진행할지 안 할지 내가 결정하였고, 진행하지 않기로 결정하면 윗 선의 보고 없이 내가 거절하면 되었다. 소통도 나 한 명으로 일원화되었고, 프로젝트 진행 후의 의사결정들도 내 몫이었다. 확실하지 않을 때는 동료들에게 물어보고 피드백을 받았지만, 결과적으로 결정을 하는 주체는 나였다. 그리고 이는 책임도 내가 져야 함을 의미했다. 처음에는 마냥 이 자유가 편했다. 내 생각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었던 환경이 너무 좋았다. 반면 내 결정으로 비롯된 실패를 두세 번 경험하고 난 뒤, 의사결정자의 무거운 책임을 몸소 느끼게 되었다. 나는 더 깊이 생각하고 다양한 경우의 수를 고려하는 사람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또한 ‘내’ 프로젝트라는 생각에서 더 애착과 열정이 생겨 시키지 않아도 일을 열심히 하는 동력이 되었다.
책에서 애런과 브라이언의 사례로 대기업과 실리콘밸리 인재의 차이를 비교한다. 대기업을 다니는 애런과 실리콘밸리의 브라이언 중, 누가 더 뛰어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닌 두 인재가 상황에 따라서 최악의 직원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애런이 꼼꼼한 기획서을 작성하는 한편, 브라이언은 구글 독스에 초안을 작성하여 동료들의 피드백을 도출해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나는 회사에 들어와서 제대로 된 기획서를 작성해 본 적이 없다. 때론 기획서 한번 안 써본 내가 이직했을 때 기획서를 쓰라고 하면 어떡하지 걱정되기도 했다. ‘A 카테고리에서 매출을 내기 위해 어떤 방법이 필요할까?’와 같은 미션이 주어지면 브라이언과 같이 구글 독스, 또는 메일에 나의 생각을 정리한 초안을 2-3일 안에 팀원들에게 공유한다. 그러면 그에 대한 피드백을 연차와 상관없이 되도록이면 많은 구성원들에게 받는다. 그중 충돌되는 피드백도 있지만, 이에 대해서는 각자의 판단에 맡기고 그 판단을 존중한다. 이런 방식이 내게는 익숙하지만 대기업의 업무 방식과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애자일 업무 방식은 데드라인 안에 완벽하게 일을 완성하는 방식이 아닌, 빠르게 프로토타입을 만들어 의견을 통해 디벨롭하는 방식이다. 이 과정에 완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 어떤 결과물이 나올지 미정의 상태로 미션(OKR의 Objective)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나가는 과정만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애자일 업무 방식에서 동료 간의 소통이 중요하다.
역할 조직에서는 피드백을 받는 자세가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피드백에 기분이 상하지 않으려면 서로에 대한 존중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동료의 시간이 허락된다면 언제든 그들의 의견을 구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내 시간이 허락된다면 언제든 피드백을 줄 준비가 되어 있다. 그렇다면 존중은 어디에서 올까. 내 실력에 대한 자신감과 동료의 실력에 대한 믿음에서 오는 것 같다. 대기업은 시스템에 적응할 정도의 머리를 가진 성실한 인재를 원하는 반면, 스타트업은 ‘나보다 뛰어난 인재’를 원한다고 한다. 대기업에서는 나보다 뛰어난 사람을 뽑으면 일을 시키기가 어려워지지만, 스타트업에서는 나보다 못한 사람을 뽑으면 그의 몫까지 대신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동료가 최고의 복지라는 우리 회사의 격언을 덧붙이고 싶다. 스타트업도 경쟁체제를 취하고 있지만, 나는 실력 있는 동료의 성공에 스트레스가 아닌 영감을 받는다. 내가 이 회사에서 승진을 목표로 하고 있다면 동료의 성공은 엄청난 스트레스로 다가왔을 것이다. 하지만 각자의 커리어를 쌓고 있는 동료이기에, 그리고 승진을 한다고 하여도 위계질서 위로 올라가는 피라미드가 아닌 역할이 바뀌는 것뿐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탁월한 동료는 내게 영감을 주고 나 또한 영감을 주고 싶은 원동력이 된다.
서로를 인격적으로 존중하고, 서로에게 배울 점이 있을 거라는 신뢰.
각자가 저마다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줄 거라는 신뢰.
다른 의견이나 합리적인 비판을 감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는 신뢰.
-여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中
이 책에서 설명한 환경에서 직원도 행복하게 일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 점이 중요하다. 나는 내 일이 즐거웠고, 내 동료들도 힘든 와중에 일에서 보람을 느끼는 것처럼 보였지만 다른 친구들에게 말했을 때 믿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내가 스타트업에 있기 때문에 스타트업 바이브에 취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었다. 내 일과 회사를 싫어하는 것이 디폴트인 한국에서 나는 단순히 애사심이 강한 사람으로 비쳤을 수도 있다. 이 책은 내 행복에 원인을 찾아주었다. 이제 애사심이 아니라 내 일에 대한 애착이 강한 것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우리 회사와 책에서 말하는 에어비앤비, 트위터와는 다른 점이 훨씬 많다. 책의 1장에 저자가 트위터에 입사한 첫날 일을 시키지 않아 당황스러웠다는 경험담을 읽었을 때, ‘응~우리 회사는 아니야~’라는 생각으로 읽어 내려갔다. 하지만 읽을수록 유사한 점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다 읽고 난 후에는 우리 회사가 지향점을 향해 변해가는 길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의 뼛속 깊이 박힌 위계질서를 바꾸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역할 조직으로의 변화가 회사의 성과를 위해서도, 직원의 행복을 위해서도 정답이라면 변화는 시작되어야 한다. 우리 회사도 지난달 모든 직함을 ‘역할 중심’으로 바뀌었다. 우리 대표님도 이 책을 읽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많은 대한민국의 대표님들이 이 책을 읽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