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천8동
아이와 처음 겪는 모든 일은 부모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다. 사람이란 식성이 바뀌기도 하고 그때의 기분에 따라 그냥 먹는 것 자체가 싫은 경우도 있다. 하지만 부모에게 아이가 처음으로 먹은 음식은 ‘좋아하는 음식’이 되고 반면 거부한 음식은 ‚아이가 싫어하는 음식’이 된다. 내 어머니도 자기 아들을 정의하는 몇 개의 문장들이 있었다. 얘는 정리를 잘해. 얘는 참을성이 없어. 얘는 생선을 안 먹어, 등등. 개인적으로는 다른 이유가 있지만 어머니도 나름의 경험과 통계 데이터에 근거하여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청소년기를 지나며 몇몇 정의들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의견을 내고 정정하기도 했지만, 한 가지 일 만큼은 굳이 언급하지 않고 지금까지 두는 것이 있다.
우리 집에서 소아과를 가려면 버스 정류장 네 개 정도의 거리를 걸어가야 했다. 그때는 마을버스도 없었으니 봉천동 구석지에서 큰길까지 나가는 일은 간단치 않았다.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나는 조금 걷다가 힘이 들어 어머니 등에 업혔던 것 같다. 어머니는 내가 열이 나면 먹은 것을 다 토해낸다고 말씀하시곤 했는데 이 때도 바로 그때였다. 해가 진 저녁 시간, 전봇대에 가로등만 몇 개 켜져 있는 긴 길을 지나고 사람들이 붐비는 시장 길도 지났다. 그제야 네온사인이 켜진 상점들이 보이고 버스가 다니는 큰길이 나왔다. 그 잠시의 순간 감각이 열려 사람 소리 차 소리가 들렸고 반짝이는 조명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나를 엎고 빠른 걸음으로 병원을 가시던 어머니의 등이 보였다. 어머니가 길을 건너신 그다음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때만 해도 의료보험이 지금 같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가는 것 자체가 어머니께는 큰 부담이었을 것이다. 허리 디스크가 가족 병력에 있는 터라 대여섯 살 된 남자아이를 엎고 그 긴 거리를 가는 일도 결코 쉽지 않았을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자신의 심적 육체적 어려움은 다 생략하시고 자기 아들이 얼마나 아팠었는지만 말씀하신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 앞에서 만큼은 열이 나면 안 되는 사람으로 살고 있다.
나도 아이를 데리고 응급실에 간 경험이 두 번 있다. 큰 아이의 증상은 그리 심한 것은 아니었지만 주말이라 하는 수 없이 응급실을 간 것이었고, 작은 아이의 경우엔 실제 응급이었다. 세 살 딸아이의 이마 한가운데서 피가 흐르는 걸 보며 마음이 차분할 수 있는 부모는 없을 것이다. 나는 머리 쪽으로 피가 쏠리지 않도록 아이를 눕혀 안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감사하게도 찢어진 범위가 길지 않아 꿰맬 필요는 없다는 의사 선생님 말씀을 듣고서야 큰 한 숨을 내쉬었다. 이 날 후로 침대는 우리 집에서 놀이 금지 영역이 되었고, 나를 업은 채 빠른 걸음을 걸으시던 어머니의 등은 내 머리와 가슴에 더 가깝게 닿았다.
끝이 없을 것 같이 길었던 봉천동 골목길과 시장길은 이제 없다. 청소년이 되어 어릴 적 동네를 찾아간 적이 있다. 그러나 골목길은 통째로 사라져 버렸고 그 자리엔 큰 연립주택이 들어서 있었다. 통닭집이 있던 재례식 시장도 이제 더 이상 없다. 아파트 단지 개발이 온갖 맛있는 냄새를 풍기던 그 시장길을 쓸고 지나갔다. 비록 길은 지도에서 사라졌지만 그 길을 따라 나를 엎고 가시던 어머니의 따뜻했던 등은 아직 있다. 그리고 어머니께서 아직 살아계신 한 그 길도 내 안에는 생생하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꼭 남아야 할 것들은 이렇게 남겨지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