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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세상이 된다는 것은

인생의 반려가 된다는 것

by 아트인사이트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새벽 6시, 갈증이 나서 눈을 떴다. 그 애는 아직 자고 있다. 거실로 나가 목을 축이고, 다시 그 애가 덮은 바스락거리는 이불 사이로 슬쩍 들어가 더 깊숙이 몸을 맞댄다. 곤히 잠든 숨소리와 규칙적인 심장박동 소리에 안심이 된다. 실눈을 뜨고 바깥의 기척을 살피다 다시 그 애를 따라 잠이 든다.


불쾌한 소음과 진동이 큰 소리로 반복되고, 그 애는 가까스로 눈을 뜬다. 눈을 뜨자마자 반짝이는 불빛을 자신의 얼굴 가까이 들이민다. 차갑고 딱딱한 그것을 한동안 만지다가 나를 보고는 미안하단 듯이 다시 그것을 내려놓고 내게 다가온다. 그래, 그래도 아침 인사는 해야지. 나는 생각한다. 그 애는 미안하다는 말과 사랑한다는 말을 쉽게 남발한다. 왜 그 말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나는 금세 풀어져 헤실거린다. 배에 볼을 부비다가 잠시 꼭 껴안고 눈을 맞추던 그 애는 곧 분주하게 움직인다. 오늘은 침대에서 뒤척거리는 시간이 짧네. 아쉽다. 더 만져주지.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자연스레 그 뒤를 따른다.


그 애와 함께 아침을 먹었다. 자발적으로 몸에 물을 묻히고 천둥처럼 큰 소리가 나는 바람을 곧바로 바쁘게 쐬는 것으로 보아 나갈 채비를 하는 것 같다. 익숙한 장면에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진다. 오늘 그 애가 없으면 나는 홀로 집에 남아야 한다. 나는 외로움을 곧잘 타는 편이다. 가지 마! 외치며 두 발로 서둘러 움직이는 그 애의 한쪽 팔을 잡는다. 걔는 곧 올 거라며 대수롭지 않게 내 팔을 떼어낸다. “누나 금방 올게, 집 잘 지키고 있어.”


끼익, 문이 열리는 소리, 곧이어 쾅,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다. 예전에는 목놓아 부르면 돌아볼 줄 알았지만, 지금은 한두 번 부르다가 그만둔다. 그런다고 오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체념이란 것이 이런 걸까. 언제 돌아오는지는 늘 그랬듯 모르겠지만, 공허의 시간을 견뎌야 하겠지만, 이제는 그렇게 쉬지 않고 부를 체력마저도 되지 않는다. 헛헛한 마음에 삑 소리가 나는 장난감을 입에 문다. 텅 빈 집에 냉장고 진동 소리와 삐익 삑 소리만이 유독 크게 울려 퍼진다.




알 수 없는 그 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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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애는 나에게 볕이라고 말했다. 꽃이라고 말했다. 여름이라고 말했고 함초롬히 젖어있는 아침 이슬이라고도 말했다. 그 애는 종종 내 배를 다감하게 어루만지며, 기억에 깊이 아로새기듯 내 발바닥의 체취를 힘껏 들이마시며, 그렇게 말했다.


아침 산책을 하다 젖은 풀잎의 이슬을 맛본 적이 있다. 그 옆에 향기로운 꽃향기를 맡은 적이 있다. 기분 좋은 자연의 맛과 냄새였다. 신이 나서 네 발로 젖은 흙을 밟고 뛰어다녔었다. 그 애는 내게 그것과 같다고 했다.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애의 다정한 손길로 나는 알 수 있었다. 나를 무척이나 좋아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나도 그 애가 좋다. 좋아서 자꾸 눈길이 간다. 그 애가 무언가를 먹을 때에도, 높낮이가 다른 음들을 흥얼거릴 때도, 멍하니 누워있을 때도, 나를 보지 않을 때도 나는 걔만 바라보고 있다. 아, 그 애가 뭘 먹을 때는 제외하겠다. 걔보다 그의 먹잇감이 더 흥미로워 보이긴 하니까. 그래도 대체로 나는 항상 앞발에 턱을 괴고 걔를 주시하고 있다. 그 애가 누워있을 때, 그 옆구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으면 기분 좋은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 애가 손뼉을 치며 입을 크게 벌리고 “하하하”소리를 낼 때면 나도 벌떡 일어나 신나게 꼬리를 흔든다. 그 애의 눈에서 물 같은 게 떨어지면 가만히 그 애와 눈을 맞추거나 그 애를 핥는다. 누가 알려준 것도 아니지만 그냥 그렇게 된다.


걔가 내 곁에 있을 때부터, 내 밥을 챙겨줄 때부터 나는 걔를 좋아하기로 다짐했다. 좋아하는 것에 대단한 이유는 필요치 않았고, 머지않아 나의 시야에는 그 애만 큰 화면으로 가득 찼다. 곧 그 애는 나의 세상이 되었다.


걔도 내가 좋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걔를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많다. 걔는 손바닥만 한 빛이 나는 물건에 정신을 자주 빼앗긴다. 종일 그것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도 있다. 나는 걔의 발소리만 들려도 신이 나는데, 걔는 내가 달려와도 그것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고 나를 쓰다듬을 때도 있다. 그 애는 그 애와 닮은 체취와 외모를 가진, 그 애보다 더 오래 산 것 같은 사람과 둘도 없는 친구처럼 웃다가도 가끔은 날카로운 말들을 주고받는다. 누군가 그 애의 식사를 훔쳐먹거나 그 애의 뒷다리를 물어뜯은 것도 아닌데, 뜬금없이 이마를 찡그리고 한숨을 푹푹 쉴 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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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이제 어엿한 9년 차 강아지가 되었다. 그동안 그 아이와 함께 살면서 느낀 것이 있다. 바로 인간들이 진심으로 꼬리를 흔드는 일은 생각보다 많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복잡하고 가끔 개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을 한다. 눈앞에 사랑하는 이를 두고도 외면하고, 그보다 작고 네모난 상자 속의 타인의 삶에 귀 기울인다. 당장 이빨을 드러낼 일이 생기지 않았는데도 지레 겁을 먹고 꼬리를 감추는 일을 자주 한다. 인간들은 그것을 ‘걱정’이라고 부른다. 나와 같은 종류의 친구들은 보통 누가 내 먹잇감을 탐낼 때나 이빨을 드러낸다.


그 애는, 그러니까 나의 주인은, 가끔 내게 “네가 사람보다 낫다.”는 말을 한다. 으쓱하고 고개를 돌렸지만, 사실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 인간들은 우리보다 똑똑하면서, 필요 이상으로 지금의 삶을 낭비하기 때문이다. 다가올 일로 찌푸리지 말고, 지금 즐겁게 꼬리를 흔드는 것. 삶의 목적을 찾는 것보다는 삶이 목적이라는 것. 사랑하는 이들을 핥아주는 것, 그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는 것으로 충분한 삶이란 것을 아는 것. 뻔한 말이지만 인간들은 이것을 개보다도 모른다. 나는 그 애를 이해할 수 없지만, 사랑하기에, 매일 그것을 실천하는 법을 몸소 보여준다.




누군가의 세상이 된다는 것은



“유기견 한 마리를 데려온다고 세상이 바뀌지는 않겠지만, 그 개에게는 세상이 바뀌는 일이다.”

우연히 어딘가에서 이 이야기를 듣고, 종일 나만 바라보고 있는 반려견의 세상을 떠올려보았었다. 생각해보니 그랬다. 내가 반려견에게 보여주는 세상이, 그 애가 아는 세상의 전부였다. 내가 어떤 세상을 보여주냐에 따라 반려견의 눈앞에 향기로운 꽃밭이 펼쳐질 수도 있었고, 캄캄하고 지루한 어둠 속일 수도 있었다. 그게 뭐든 그들은 세상이란 것을 그렇게 기억할 터였다. 반려견의 세상을 빚어내고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내게 있었다.

위의 글은, 나의 일상에 지쳐 반려견에게 잠시 소홀해졌다고 느꼈을 때, 반성하기 위해 그의 입장에서 써둔 글을 토대로 썼다. 개의 입장에 서본다면 더 나은 걔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개의 사랑은 절대적이고 희생적인 것이어서, 계속 노력하지 않으면 그만한 마음을 줄 수가 없다. 지금도 부족한 주인이지만, 반복해서 내가 쓴 글을 읽어보며 그의 세상을 다채롭고 풍부하게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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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려’. 사전적 의미로 ‘짝이 되는 동무’.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존재와 소통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헌신적으로 나만 바라보며 보드라운 털을 맞대오는 반려견의 온기를 느끼다 보면 소통을 넘어서 진정한 교감을 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사랑하는 나의 반려견 달루가 올해로 9살이 되었다. 달루의 시간은 나의 시간보다 빠르게 가기에, 함께하는 동안만큼은 그가 내 곁에서 충만함을 느끼도록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다짐했다.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가는 그를 보면서 헤어짐을 생각하는 날도 적지 않은데, 훗날 그가 지난날을 회상했을 때, ‘이만하면 따뜻하고 아름다운 세상이었어.’라고 한마디 내뱉는다면 그 이상의 바람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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