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트인사이트 Mar 23. 2022

깨진 유리컵 조각을 주워 담다가


얼마 전 아끼던 유리컵을 깨고 말았다. 설거지를 하던 중이었는데, 미끈거리는 주방 세제가 잔뜩 묻은 손의 감각에 익숙지 못했던 탓인지, 그만 싱크대에 놓치고 만 것이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애지중지 아끼던 유리컵은 처참하게 두 동강이 나버리고 말았다.

 

아주 짧은 순간 나는 이건 깨진 게 아닐 거야, 내가 잘못 본 걸 거야,라며 자기최면도 걸었다. 그만큼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닥친 현실을 마주하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컵이 깨진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천천히 나는 깨진 유리컵 조각을 하나 둘 주워 담으며 바꿀 수 없는 과거를 천천히 받아들였다.

 

그렇게 잊힐 줄만 알았는데. 그날 밤 자려고 누웠는데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그저 아끼던 유리컵이 깨졌을 뿐인데, 내가 지금껏 잃어버리고 망가뜨린 것들이 하나 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나는 홀린 듯 침대에서 일어나 깊은 새벽에 온 집 안을 다 헤집었다. 입었던 옷가지와 가방들, 서랍들까지 전부 다 뒤졌다. 정말 아무 곳에도 없었다. 손바닥만 한 작은 메모장 하나가.

 

나는 종종 메모를 하기 위해서 손바닥만 한 작은 메모장을 가지고 다니곤 한다. 메모장에는 짤막한 단상이나 영감에서부터 간직하고 싶은 말이나 글까지 온갖 잡다한 것들로 가득 메워져 있었다. 근데 이게 없어진 것이다. 잃어버린 게 분명했다.





작년 겨울에는 7년인가 8년 동안 사용했던 손지갑을 잃어버렸다. 4년 전 겨울에는 어릴 적부터 매일 밤 침대 한편을 지켰던 애착 인형인 하얀 곰인형을 잃어버렸다. 실수로 핸드폰 속 연락처나 사진들을 몽땅 잃어버린 적도 있었다. 자동 저장해 두지 않아서 쓰던 글이 날아가는 것도 부지기수다.

 

잃어버린 것들 중 유독 마음에 남아 떠나보내지 못하는 것들은 주로 나와 함께한 시간이 길어진 것들이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 물건에는 나조차도 예상치 못할 정도로 지나온 삶의 지문들이 무수히 찍혀버려서, 세월의 흔적이 쌓여 오래된 만큼이나 애착이 생기게 된다. 그리고 그 시점에서 소유한다는 것은 행복과 불행을 모두 불러온다는 오래도록 아이러니함을 지닌 질문의 무게가 더 늘어나게 된다. 소유했던 것을 잃어버리게 되는 그 순간부터 불행이 닥쳐오기 때문이다. 그것과 함께한 지난 시간들이 야속하리만큼 뚜렷하게 떠오르기 시작한다.

 

집에 불이 나게 된다면 가장 먼저 사진 앨범부터 들고 뛰쳐나올 거라던 나의 답변에 피식하고 웃던 친구의 표정이 떠오른다. 시간의 자국들이 무성한 것들을 잃게 되었을 때 내가 너무 속수무책으로 무너져버리는 건 아닌지 온갖 상념들이 머릿속을 가득 메운다. 오래된 연인과 쉽게 헤어지지 못하는 이유가 지난날 사랑했던 시간들이 아까워서라는 친구의 답변에 그게 뭐라고, 바보같이 미련하다며 웃어버리던 내가 떠오른다.

 

물론 안다. 물건 하나 잃게 된다고 해서 그 물건과 함께했던 나의 과거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러나 쉽지 않다. 애착 곰인형을 잃어버렸을 때에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막 나왔었다. 그다지 값이 나가지도 않는 흔하디흔한 곰인형일 뿐이었는데. 당시에 나는 마치 그 인형과 함께한 지난 시간들이 통째로 다 날아가 버린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허무했고 절망적이었다.

 

소유한다는 건 그만큼 많은 책임과 고통을 수반하는 것이기도 하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기를 원하게 되기도 하고, 이미 소유한 것을 잃지 않으려 진땀 빼느라 가진 것들을 다 잃기도 한다. 혹은 소유할 수 없는 것임에도, 단 한 번도 소유한 적이 없었음에도, 내가 그것들을 소유하고 있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소유는 이렇게 양날의 검 같다.


나는 앞으로 살아가며 많은 것들과 함께할 거고, 또 그것들을 잃어버릴 거다. 그러나 잃어버린 것을 잊어버리는 건 늘 어렵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것들을 떠나보내는 순간들을 매번 겪었음에도 면역은 생기지 않고 자꾸만 더 어려워진다.

 

지갑을 잃어버렸을 때, 지갑 사진과 함께 대학 커뮤니티 앱에 분실물을 찾는다고 글을 올린 적이 있다. 그때 달린 댓글 하나가 기억 속에 남아 오래도록 맴돈다. 댓글의 내용은 이렇다. '지갑이 많이 낡았네요. 지갑도 이제는 힘들어서 잠시 여행을 떠났나 봐요.' 그럴리가 없음에도, 묘하게 커다란 위로로 다가왔던 그 댓글이 잃어버린 것을 오롯이 잘 잊어버리는 방법을 찾을 수 있는 열쇠가 될까.

 

새로 구입한 근사한 유리컵에 내린 차가 오늘따라 유난히도 쌉싸름하다.

 

 

 

 

작가의 이전글 영화와의 기억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