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과 방도 아닌, 문지방 위에 있는 이방연애
내 노트북에는 동생이 준 스티커가 붙어 있다. “We should all be feminist”. 나는 사실 이 스티커를 붙이기 전에 망설였다. 소프트웨어학과 수업을 듣기에 학교에 노트북을 거의 매일 들고 가야 하기에 많은 사람들이 이 스티커를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내가 페미니스트라고 규정되기가 두려웠다.
과거에 그런 글을 읽은 적이 있다. 100명의 페미니스트가 있다면 그 곳엔 100개의 페미니즘이 있는 것이라고. 하나의 단어로 묶이지만 우리는 모두 다른 스탠스를 취하고 있다. 나는 모두가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는 말에 동의한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페미니즘이 되어야 한다고 나서서 말하기는 조금 어렵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페미니즘에 대한 고민 없이 단순히 ‘페미니스트’가 싫다고 말하는 사람의 말에는 대꾸할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항상 고민한다. 나는 페미니즘에 대해 목소리를 내기 전에 충분히 나의 입장을 정리하고자 애썼다. 처음 나는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는 그들의 모습이 낯설고 부담스러웠다. 아직도 함무라비 법전에나 나올 법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식의 태도는 결국 또 다른 갈등과 거부감을 야기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모든 이의 신념과 행동을 존중하자는 생각을 지니고 있지만, 그것이 타인에게 피해를 준다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나는 미러링이라는 행위에 대해서는 반대한다.
하지만 일련의 과정들을 지켜보면서 자극적인 행위가 빠른 변화와 관심을 이끌어낸다는 것을 알았다. 고 전태일 열사의 분신처럼 사람들은 ‘스스로의 몸을 불사를 정도의’ 충격을 주는 사건이 아니면 쉽게 관심을 주지 않는다. 칸트였던가, 과거 저명한 학자께서는 ‘남성과 여성은 절대로 서로를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장님이 코끼리를 자기 멋대로 상상 하듯 우리는 결코 서로의 입장이 되어볼 수 없기에 서로의 관점으로 사건을 바라볼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여성의 일은 남성들에게 절대적으로 남의 일이 되는 것이고, 자신과 관련 없는 일이라 생각하며 관심 또한 상대적으로 없을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그들의 영역 속에 이 문제 상황을 집어넣기 위해 그들에게 일종의 ‘피해’를 주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페미니즘과 여성학에 대한 공부를 하는 것이다. 내가 어떤 입장을 취하는 것이 좋을 지에 대해 생각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 책도 읽고 연극도 보고 대화도 나눈다. 모두가 각자의 목소리를 지니고 있고, 나름의 고민을 지속하고 있다. 이번에 좋은 기회로 페미니즘 연극제의 ‘이방연애’를 관람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소수자인 여성 속에서 더 소수인 퀴어들이 지금까지 어떤 연애를 하고 살아왔는지 자기고백적으로 토로하는 형식의 연극이다.
나는 앞서 말했듯 타인에게 피해만 주지 않는다면 모두를 이해한다. 이유 없는 혐오를 혐오한다. 하지만 세상에는 퀴어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혐오하는 ‘평범한’ 사람들이 많다. 사실 아까 말한 페미니즘이나 퀴어나 비슷한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페미니즘에 대해 제대로 공부한 사람이 생각보다 많이 없듯이 사랑에 대해 본격적으로 탐구했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많진 않을 것이다. 사랑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생물학적으로 종족 번식을 목적으로 살아가도록 설계되었는데, 번식의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는 상대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이 느껴질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랑이라는 것은 단순한 수단적 요소가 아닌 것일까, 이렇게 시작되는 의문에 대해 답을 찾으려 고민해 본 사람이 퀴어에 대해 그렇게 함부로 말 할 수 있진 않을 것이다. 물론 어떻게 답을 내리든 그것은 그 사람의 자유지만 말이다.
포스트 모더니즘에 대해 토론을 한 적이 있다. 거기에 대해 공부하면서 알게 된 것은, 무수히 발생하는 존재 속에서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보편성을 획득하는 과정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여성 퀴어는 그 수많은 존재들 사이에서도 가장 보편적이지 않은 존재들이다. ‘이방연애’ 포스터를 처음 봤을 때 인상깊었던 점은 그 속에 담긴 대사 한 구절이었다.
“자, 세상이 하나의 집이라고 생각해봐요. 따로 또 같이 사람들은 어떤 방에 들어가 있겠죠. 근데 저는요, 방이 아니라 방과 방 사이, 문지방 같은데 누워 있는 기분이었어요, 줄곧.”
부정당하는 존재로 사는 삶은 내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종류일 것이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끊임 없이 타인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 받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들은 ‘성적 취향’이자 ‘사랑’이라는 어떻게 보면 삶에서 그다지 큰 부분을 차지 하지도 않을 것을 위해 온 삶을 내던진 것이다. 그래서 이 연극이 기획된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목소리를 냄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재확인하기 위해 내가 여기 이렇게 존재하고 있음을 알리려는, 살기 위해 버둥대는 백조의 발장구 같은 것은 아닐까 짐작해 본다.
글 - 아트인사이트 에디터 서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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