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작품은, 이야기가 무대에 오르기 전의 모습까지도 상상하게 만든다고.
[쓰다]
- 어떤 건물이나 장소를 일정 기간 사용하거나 임시로 다른 일을 하는 곳으로 이용하다. (출처: 표준국어대사전)
이런 말이 있다. 뛰어난 작품은 이야기가 끝나고 난 후에 관객들의 가슴 속에서 다시 새롭게 시작된다고. 극장 밖으로, 미술관 밖으로, 공연장 밖으로, 책장 밖으로 광활하게 펼쳐지는 이야기들. 공감한다. 안목이 뛰어나진 않지만 내 가슴 속에 족적을 남긴 작품들은 분명히 있다. 여전히 아주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면서 존재한다. 그러나 ‘좋은 작품’이라는 기준을 정의 내리는 데에 조심스레 의견을 보태보자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좋은 작품은, 이야기가 무대에 오르기 전의 모습까지도 상상하게 만든다고.
유명 밴드의 라이브 공연을 보고 난 후 들었던 생각이다. 좌중을 압도하며 능수능란하게 가사와 멜로디를 다루던 모습을 보면서 무대 위의 그들이 그들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얼마나 치열한 준비와 강구가 있었을지. 쉽게 비교할 수 없는 부분이지만, 의구심만 남았던 버스킹 공연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거리를 빌린 것이라 해도 엄연히 ‘무대’인데 가사조차 숙지 않고 핸드폰 화면만 들여다보며 노래를 이어나가는 공연 말이다. 악보를 보는 것도 아니고 핸드폰과만 아이컨택을 하고 있는 모습이란. 소박한 자리라도 빌려 노래하고 싶은 이들의 심정을 가볍게 여기고 싶진 않다. 그러나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이야기를 가진 사람인지에 대한 관심은 현저하게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거리에서도 멋진 공연을 선사해주시는 분들은 많다. 그러나 오히려 최선을 다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들 스스로 부족함과 아쉬움을 느낄 것이다. 내가 보여주는 어떤 순간이 누군가의 머릿속에 영원히 박제된다고 생각한다면. 그럴 수밖에 없지 않나?
'무대를 쓰다'의 의미는 단순하지 않다. 무대는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드러나는 구체적인 장소다. 그러나 이야기 자체는 무대 훨씬 이전부터 시작되었다고 봐야 한다. 한 연극이 있다고 해보자. 그 연극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작품을 쓸 수밖에 없는 욕망과 충동을 작가가 경험해야만 한다. 느낌을 놓치지 않기 위해 그가 궁극의 힘을 다해 희곡을 써는 지리멸렬한 시간이 있었을 것이고. 이어서 작가는 다른 전문가들이나 동료들과 함께 논의하여 이야기를 무대에 올릴 준비를 하고, 최적의 공간을 물색해 디자인 과정을 거친다. 이 모든 게 이야기의 삶이다. 주인공이 처음으로 핀 조명을 받을 때에야 이야기의 탄생이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막이 내리고 모든 무대 장치들이 제거되는 극의 임종. 근사한 작품을 떠나보낼 때 나는 ‘최초’를 알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작품이 이야기로 재단되기 전, ‘욕망’의 형태였을 때의 순간 말이다. 너무 뜨거워서 형편없고, 너무 진솔해서 오히려 내 이야기가 아닌 것만 같은 ‘욕망’. 허둥지둥 거리긴 해도 무서울 정도로 정확하게 나를 정복하는 감각들. 그곳으로 눈을 돌리게 한 작품을 만날 때 깊은 감격과 놀라움을 느끼곤 한다. 타인의 아주 내밀한 욕망에게도 깊게 공감하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을 보면서 말이다. 작품의 무대 이전 모습까지 통째로 느껴보고 싶은 감정이라고 설명하면 될까. 사랑과 비슷한 충동이라 한다면 적절할지 모르겠으나, 사랑하는 이의 옛날 사진을 볼 때 내가 모르는 그 사람의 긴 과거를 감지하면서 묘한 신비로움을 느낄 때 있지 않나. 그것과 비슷하다.
나는 시를 쓴다. 내 무대는 백지고. 백지 위에서 만나는 완성된 시들을 보고 있노라면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썼다 지우기를 반복한 긴 퇴고의 시간들을. 90까지 적어놓고 10이 되지 않아 통째로 버렸던 시. 50밖에 적지 못했는데도 자꾸만 가슴이 설레는 시. 100이 되었지만 혼자서만 보는 시. 가슴은 잠식되었지만 아직 1인 채로 도사리고 있는 시. 너무 쉽게 꺼내 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과 얼른 자유로워지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버텨보던 시간들은 작품만큼이나 소중하다. 최고의 결과물은 아니더라도 최선의 사랑은 할 테니까. 어쩌면 창작자에게 더 중요한 것은 작품 자체보다도 작품과 함께한 시간일지도 모르겠다. 무대는 가장 아름다운 이별이 펼쳐지는 곳이고.
이야기와 ‘잘’ 헤어질 줄 아는 무대가 웰메이드 무대다. 그래야만 우리에게로 건너온 이야기가 무대 밖을 나서서, 뿔뿔이 흩어지는 우리와 함께 하지 않겠는가.
글 - 아트인사이트 에디터 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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