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아주 간단한 재료들로 맛을 내는 파스타 레시피를 하나 발견했다. 이 정도면 충분히 해먹어볼 만하다 싶어 시도했는데 웬걸. 토핑으로 들어갈 새우를 장만하는 데만 한 세월, 화구 하나엔 파스타 면을 삶아놓고 다른 하나엔 프라이팬을 올려 소스를 만들자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엄마가 같은 레시피로 파스타를 두 차례 뚝딱 만들어낼 동안 나는 겨우겨우 1인분을 만들었다. 요리에 서툴러 허둥대느라 자주 해먹을 엄두가 안 난다는 이야기를 했더니, 엄마는 웃으며 덧붙였다. 내가 주방에 있은 지가 몇 년인데, 당연한 거지.
내가 따라해서 그럴 듯한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한 레시피였고, 나름대로 맛도 꽤 있었지만 이것이 나에게 정말 '간단한' 일이 되기까진 꽤 수고스러운 과정이 필요하겠다 싶었다. 화구 두 개를 동시에 살피면서 허둥대지 않을 정도로 능숙해지려면, 이 레시피를 몇 번 정도 반복하면 될까.
엄마의 대답처럼 어떤 일에 능숙해지기까지 시간이 필요한 건 당연한 일이다. 그 변화 역시 단계적인 것이다. 파스타 한 접시를 손쉽게 만들어낼 수 있을 때까지, 불어터진 면을 먹어도 보고 소스를 태워도 봐야 한다. 시간과 함께 나의 미숙함을 천천히 다듬어나가는 것이다. 그럴 듯한 결과물을 낼 수 있게 되려면 미숙함은 필연적으로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
하지만 이 당연한 상식과는 상충되게, 난 언젠가부터 세상이 사람들에게 미숙할 수 있는 기회를 잘 주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 내가 한가하게 파스타를 연습할 여유를 매일같이 가질 순 없는 것처럼, 요즘의 사회는 그 미숙함을 함께 견뎌내줄 여유와 자원이 없으니(그게 사실인가는 차치하고) 우리에게 알아서 갖춰 나오라고 말하는 것 같다. 마치 잘 포장된 완제품처럼, 마법처럼 나타난 완성된 존재에 대한 요구.
많은 채용 공고에서는 일처리 센스를 갖춘 경력직 신입을 원한다. 어른들은 아이들을 세상에서 밀어내면서도, 그들이 세상을 통해 배워야 하는 것들을 자연스럽게 탑재하고 경험 없이도 성숙하게 행동하길 바란다. 미숙해서 미처 채우지 못한 공백, 그건 온전히 개인이 감당해야 할 책임과 인내의 과정이라는 것처럼. 그렇게 가시적인 세상을 채우는 건 미숙함의 과정이 생략된 결과들이다.
그 결과들 속의 내가 미완성품처럼 보일까봐, 어딘가 결함이 있는 것처럼 보일까봐 나는 과정을 드러내는 일이 점점 두려워졌다.
문제는 그런 시선이 내면화되어 내 일부가 되어버린다는 점이다. 나는 이제 세상이 나서서 날 압박하지 않는 영역에서조차 내 미숙함을 견딜 수가 없다. 가령 취미라든가.
초면의 상대를 파악하기 위해 으레 하는 질문인 것을 알면서도, 나는 누군가 나에게 좋아하는 일이나 취미 따위를 물어오는 걸 조금 부담스러워 한다. 가끔은 난감하기까지 하다. 그저 가볍게 답변하면 될 일인데, 상대는 나의 진지함을 평가하는 면접관으로 앞에 앉아있는 게 아닌데. 하지만 머릿속에서 제동이 꼭 한번 걸린다. 이걸 좋아한다고 말해도 되는 건가?
보통은 흔해 빠진 대답을 내놓는다. 영화 좀 보고, 책도 가끔 읽고요... 어물거리면서 말을 흐리게 된다. 사실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지만 이게 어떤 식으로 들릴지는 미지수다. 적당히 둘러대기 위한 무난한 대답으로 뱉어놓은 것인지, 아니면 정말 내가 이것들을 좋아해서인지는 스스로도 잘 모르겠다. 좋아하는 게 없다는 맹탕인 인간으로 보이기는 싫은데, 오히려 이 대답이 나를 더 맹탕인 사람으로 보이게 할 수도 있겠다 싶다. 좋아한다는 사람치곤 영 얄팍하니까.
분명 싫어하는 일은 아니다. 기분 전환이 필요하면 문득 혼자서 영화관을 가끔 찾고, 휴일엔 집에서 시간을 앞뒤로 텅 비워놓은 채 넷플릭스의 작품 목록을 죽죽 내리고 있는다. 끌리는 걸 하나 틀어 놓고 장면 속의 감정들을 뜯어보고 있으면, 분명 존재하나 명확하지 않은 채로 나를 짓누르던 것들이 일순에 이해되기 시작하며 일종의 해방감이 몰려온다. 가끔 책을 읽는 것도 마찬가지의 맥락이다. 가늘어서 쉽게 꼬여버리는 마음을 이렇게 종종 풀고 감아줘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경험의 질이나, 양이나, 시네필이나 애독가와는 거리가 멀지 않나 싶다. 남들이 다 보았다고 해서 꼭 그걸 다 따라갈 필요는 없지만, 무언가를 논할 수 있을 정도의 기본적인 토대가 없는데 애호가를 자처해도 되는 건지 의문스럽기 때문이다. 제대로에 대한 강박을 좀 버릴 필요가 있다고 마음 정리를 하는 글을 바로 얼마 전에 썼었는데, 취미 하나를 말하는 것에도 이렇게나 많은 잡념들이 뒤따른다.
사실 오랜 시간 몸에 밴 태도가 한순간에 잘 고쳐지진 않는다. 무슨 일이든 내가 세워놓은 기준(세상의 영향을 받기도 한 이 기준)을 어느 정도라도 충족시켜놓지 않으면 내 모든 말이 비어버린 말처럼, 책임 없는 단언처럼 느껴진다.
이런 빡빡함은 스스로를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기도 했지만, 이제는 나의 동력이었던 것이 오히려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하게 만드는 조바심에 불과하게 된 때가 온 것 같다. 완벽하지 못할까 봐 무언가를 섣불리 시도하지 못한다.
미숙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면 이렇게 매사에 힘이 들어가게 된다. 이런 부담스러운 태도는 왜 모든 구석에 배어버린 걸까. 나는 여전히 갈피를 못 잡는 중이고, 이 글을 쓰는 와중에도 몇 번을 지웠다 썼다, 주제를 바꿨다 되돌렸다를 반복했다. 나를 용인하지 못하는 건 스스로인지, 세상인지, 알 수가 없어 혼란스럽다.
적어도 즐겁고자 하는 일들이 나를 괴롭게 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힘을 빼도 되는 순간이나 힘이 들어가지 않는 순간에는, 나를 억지로 일으키는 고집을 버리고 싶다. 미숙함을 다듬어나갈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법을 알고 싶다. 잘하지 못하는 나를 못 견뎌하지 않는 법을 알고 싶다. 이 도돌이표처럼 지긋지긋하게 돌아오는 문제를 난 대체 언제쯤 풀어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