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드 ‘혁오’가 다시 돌아올까? 마지막 앨범이 나온 지 어느덧 4년이 넘었다. 그들의 신보를 듣는 상상을 하다 그만두기를 반복한다. 그러다 그들이 ‘영원한 하이프(hype)’으로 불멸하는 상상을 시작한다.
이 글은 <사랑으로>에게 바치는 헌사. <사랑으로>는 혁오의 다섯 번째 앨범이자 현시점 마지막 앨범이다. 발매 전 티저를 들으며 기다렸고, 발매되자마자 들었으며, 4년이 지난 지금까지 꾸준히 듣고 있다. 웬만한 앨범들은 깊게 빠지더라도 일정 수준 이상 들으면 추억의 영역으로 넘어가는데, <사랑으로>는 여전히 내게 현재의 것이다. 스물 한살부터 지금까지 나와 동행하고 있다. 스물 다섯, 젊다면 젊은 나이지만 가끔은 쏜살같이 지나버린 시간이 서럽다. 이 앨범은 그럴 때의 기분을 잘 달래 준다. <사랑으로>를 들을 때면 나는 낯선 청춘 속으로 한순간에 되돌아간다. 청춘이 아직 낯설면서도 확실히 그 안에 있다는 그 안락하고 들뜬 감각을 당신은 기억하는가. 그러면서도 <사랑으로>는 청춘의 배우자처럼 함께 늙어가며, 찰나의 청춘이라는 아쉬움을 부각하기보다 무르익는 과정 속에도 즐거움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만든다.
안정이 필요한 순간마다 <사랑으로>를 청심환처럼 찾아 듣는다. 어제도 면접 보러 가는 길에 들었다. 외부의 압박과 불안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다시 나에게로 시선을 돌리는 것이다. 앨범을 들으면 고요해지고 순수한 나만 남겨지는 기분이 든다. 요동치던 감정들이 다시 중심을 되찾는다. 이것은 <사랑으로>가 의외의 심리치료적 효과를 지녔다기보단 나와 동일시하는 착각을 할 만큼 내가 많이 들었기 때문일 테며, 그것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내 삶의 리듬과 템포가 <사랑으로>의 것과 같았으면 싶기 때문이다. 보사노바도 좋아하지만 가끔은 너무 낙천적이다. 인디도 좋아하지만 가끔은 너무 묵직하다. 락도 좋아하지만 가끔은 너무 시끄럽다. 장르적 틀에서 벗어난 <사랑으로>는 일상적이다. 우아함을 간직하면서도 일상의 리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처음 들었던 순간을 기억한다. 나는 스무 살 언저리부터 혁오를 좋아하기 시작했다. 봄이 끝날 무렵이었던 것 같다. 대학 수업을 듣고 기숙사로 돌아와 침대에 누워 가만히 ‘Simon’를 들었다. 반수면 상태로 가만히 누운 채 흘러나오던 몽롱한 사운드에 취한 기억은 아직까지도 강렬하다. 무한도전을 통해 그들을 알고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그들의 앨범을 듣기 시작하면서 순식간에 매료되었다. 좋아하는 걸 넘어 나의 영혼 일부를 기증했다. 좋아한 지 몇 개월 되지 않아 그들의 앨범 명을 타투로 새겼다. 그건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타투가 되었다. 여전히 후회는 없다.
그 때는 그들의 앨범 <24>까지 나온 시점이었고 모든 앨범을 질리도록 돌려 듣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들의 앨범명은 <20>부터 <22>, <23>, <24>까지 이어졌고, 스무 살의 나에게 그들은 인생 선배를 자처했다. 막 발아하던 청춘을 그들처럼 보내고 싶었다. ‘Lonely’나 ‘Panda Bear’를 들으며 외로움을 달랬고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위로를 받았다. 오혁을 동경했다. 그처럼 살고 싶었다. 철없이 부푸는 생각들을 하며 스무 살은 흘러갔고 그 생각이 정말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순수한 동경심은 쉽게 휘발되지 않는다. 오래 내 안에 남아 은연중에 나를 이끌어간다.
스물 한살이 시작되던 무렵 그들의 신보 소식을 들었다. 발을 동동 구르며 발매일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당일 저녁 6시. 대학 와서 맞는 첫 겨울방학이었고 지금은 기억도 안나는 이유로 동기들과 과방에 앉아있었다. 그들이 떠드는 소리를 무시하며 떨리는 마음으로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재생버튼을 눌렀다. 기존의 혁오 음악과는 결이 다른 사운드였다. 하지만 좋았다. 황홀할 만큼.
‘New born’은 정말 다시 태어나는 기분이 든다. 9분 가까이 되는 서사에 귀 기울이다 보면 듣기 전과 후의 내가 어딘가 분명 달라진 것만 같다. ‘Silver Hair Express’의 가사는 단 8단어다. (알아가거나/잊어가거나/사랑하거나/슬퍼하거나//잊어가거나/잊혀가거나/사랑해야지/슬퍼하지마) 단순하지만 거대한 이 여덟 마디가 사실 우리네 인생의 전부일지도 모른다. 다른 수록곡들도 마찬가지다. 모두 하나하나 정체성이 뚜렷하지만 전부 한 곡처럼 이어져 있다. 혁오가 모든 수록곡을 타이틀로 지정한 이유이기도 하다.
보사노바와 인디락 그 사이 어딘가, 정제된 세련미, 다층적인 미니멀리즘, 무거운 산뜻함, 폭발하는 심해… <사랑으로>를 무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이 아리송함이 질리지 않게 만드는 매력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라는 사람을 단 한 장의 앨범으로 정의내리라 한다면, 나는 조심스럽게 <사랑으로>를 고를 것 같다. 좋은 앨범 정말 많지만, <사랑으로>는 스스로 변모한다. 산뜻한 봄날 산책하면서 들어도, 우울 속으로 침잠하는 새벽에 들어도 묵묵히 품어줄 뿐이다. 이런 앨범이 세상에 존재하고 내게 찾아왔다는 건 고마운 일이다. <사랑으로>에게, 혁오에게, 음악에게 나는 갚지 못할 빚을 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