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love myself”마저 실천하기 벅찬 시대에 ”네 이웃을 사랑하라“라는 발언의 당위성은 위협받기 쉽다. 대신 그 자리엔 분노와 혐오가 들어선다. 그리고 그 감정의 영향력은 꽤나 강력하다. 때로는 그러한 감정들에 복무하며, 연료 삼아 사회가 굴러가는 것이 아닌가 싶어질 정도로.
그런 사회 안에서 우리는 제 권리를 주장하며 누군가의 권리를 짐짓 묵인하기도 하고, 자유를 운운하며 누군가의 자유를 손쉽게 박탈하기도 한다. 장애인 지하철 시위 현장과 노조 파업 현장에서 흘러나온 호소는 시민들의 아우성과 네티즌들의 날선 비난 속에 필터링 되어 단숨에 혐오의 표적이 된다.
이것이 민주국가라 자임하는 대한민국의 현주소다. 이뿐인가. 이제는 포스트 팬데믹에 접어들었지만, 불과 몇 년 전 최초 확진자에게 가했던 집단 린치도 같은 결의 사례다.
물론 그러한 극단적인 코멘트를 대중적인 것이라 일반화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다 같이 상생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 목소리를 내는 이들도 있으니.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고 경청하려는 데에 시간과 노력을 들이지 않으면 쉬이 분노와 혐오의 편에 설 수밖에 없는 사회에서 그러한 용기는 귀중하다.
최근 접한 아이유의 신곡 'Love Wins All'과 켄 로치의 신작 '나의 올드 오크'가 뭉근한 여운을 남긴 건, 아마 그런 까닭 때문이었을 것이다.
앨범 소개 문구에서 아이유는 이렇게 밝힌다.
“(•••) 눈에 띄는 적의와 무관심으로 점점 더 추워지는 잿빛의 세상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을 무기로 승리를 바라는 것이 가끔은 터무니없는 일로 느껴질 때도 있다. 하지만 직접 겪어본 바로 미움은 기세가 좋은 순간에서조차 늘 혼자다. 반면에 도망치고 부서지고 저물어가면서도 사랑은 지독히 함께다. 사랑에게는 충분히 승산이 있다(•••)”
’터무니없는 일’이라고 표현했지만, 어쩌면 아이유 그 자신이 살아있는 증거라 해도 무방하다. 열여덟에 솔로 가수로 데뷔해 극심한 악플과 경쟁에 내던져졌던, 어쩌면 지극히 ‘혼자’였던 이가 이제는 국가를 대표하는 ‘모두’의 뮤지션이 되었고, ‘함께’의 위력에 대해 고백하고 있으니 말이다.
인용구에서는 생략되어 있지만, 그는 ‘저무는 일’ 그러니까 대중으로부터 잊히는 언젠가를 늘 상상해 본다고 한다. 데뷔 이후부터 줄곧. 다만 과거엔 지극한 개인의 입장에서 비관에 젖었다면, 이제는 팬덤을 비롯해 본인을 줄곧 안심시켜온 존재들 덕분에 그 순간이 그리 무섭지만은 않을 것이라 믿게 되었다고.
아이유가 상정한 유토피아는 공간이 아닌 감정에 있다. 발 딛고 있는 현실, 다가올 미래가 폐허일지언정 함께 한다면 마음만은 가난하지 않다는 것. 블루칼라의 시인 켄 로치도 아마 그의 마지막 당부가 될 <나의 올드 오크>에서 같은 말을 한다.
과거의 영광만이 남은 영국의 한 폐광촌 주민들과 이곳에 임시 터전을 잡은 시리아 난민들의 삶은 절망할 것으로 가득하다. 가뜩이나 쇠락한 빈민촌에 난민 부조마저 맡아야 하는 데 불만인 일부 주민들은 대놓고 적대감을 내비치기도 한다. 한편, 마을의 험악하고 침체된 분위기를 자정하고자 TJ와 야라는 펍 ‘올드 오크’의 창고를 식당으로 개조해 마을 사람들과 난민들을 초청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끼니를 함께 하며 온기 어린 대화들을 나눈다. 결말부 시퀀스에서는 그들의 연대가 더 가시적으로 체감된다. 먼 타국에서 야라 친부의 부고 소식이 닿자, 주민들이 긴 조문 행렬을 이루어 야라 가족을 찾은 것.
당장 눈앞에 놓인 비정한 현실에 희망을 거론한다는 것은 터무니없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때로 희망은 그 기대치 때문에 더한 좌절을 안기기도 한다. 그러나 켄 로치는 희망은 멀리 있지 않다고, 생각보다 이상적인 것은 아닐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희망은 절망의 부재가 아니라, 절망을 같이 짊어지고 견디는 것의 다른 이름일지 모른다고. 심지어는 함께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희망이 될 수 있다고. 아내와 이혼한 후 삶을 포기하려 했던 TJ 곁에 마라가 있었고, 마라를 잃고 실의에 빠진 TJ 곁에 야라가 있었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