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부터 나는, 완결된 것들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인간처럼 매일매일이 다른 존재, 꽃처럼 하룻밤만에 시들 수 있는 존재, 동물처럼 먼저 세상을 뜨는 존재에는 정을 붙이기 어려웠다. 현재 진행형이라는 단어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대신에 앞으로 변화할 여지가 없는 것들, 이를테면 이미 세상을 달리한 가수나 이미 방영을 종료한 드라마나 이미 인쇄가 완료된 책들, 나는 이런 존재들에 안주하며 살아왔다.
이미 끝을 맺은 것들은 너무나도 여지 없이 확고하고 또 확실하다. 그들은 쉬이 태도를 바꾸지 않으며, 그렇기에 내가 이들을 마음 놓고 좋아하더라도 아무런 염려가 생기지 않는다. 지금 생각해보면 난 무언가에 실망하거나, 혹은 무언가를 실망시키는 일이 두려웠는지도 모르겠다. 어릴 적 내겐 관계로부터 파생된 상처를 딛고 일어날 만큼의 힘이 없었고, 그렇기에 확실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사랑할수록 매정해진다. 역설적이게도. 깊이 애정을 나누는 대상에게는 상처를 주는 일도, 혹은 받는 일도 엄청난 고역이다. 그렇기에 나는 서로가 서로에게 생채기를 남기는 그런 고통스러운 관계를 만들 바에는 차라리 좋아하는 마음을 가라앉히는 편을 택하곤 했다. 내 삶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존재가 부피를 더욱 키우기 전에 적당히 선을 긋는 것, 그것이 최선의 회피책인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저 적절한 거리 유지였는지, 혹은 과도한 불안이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그렇지만 요즘에는 무언가를 사랑한다는 것이 믿음의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대상에 대한 믿음도 맞겠다만, 그보다는 나 자신에 대한 믿음.
무언가에게 마음을 쏟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큰 용기가 필요하다. 나의 마음이 사랑이 맞음을 인정할 줄 아는 용기와, 그런 내 마음 한켠을 대상을 위해 내어줄 용기. 어떻게 해도 후회가 뒤따르는 이 바보같은 도박 속에서, 가장 확실하게 알 수 있고 또 믿을 수 있는 건 나 자신뿐이다. 그리고 나는 나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이기에, 내 마음이 향하는 길을 잠자코 존중할 책임이 있다. 물론 많은 것들을 감수해야겠지만 가끔씩은 나 자신에게 휩쓸려보기. 이것이야말로 내 마음에 대한 배려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에리히 프롬은 돌려받지 못하는 것도 사랑이라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내 마음이 존중받기 위해서는, 내가 '무얼' 사랑했는지가 아니라, '내가' 무얼 사랑해봤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면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 대상과 나의 마음이 불일치하더라도, 나 자신이 변하지 않는 한 내 마음이 아예 헛되어지지는 않을 것 같다.
결국, 무언가를 좋아하는 자신의 마음을 믿으면 된다. 자신에 대한 확신이 선명할 때, 우리는 휩쓸리지 않을 것이다. 그 무엇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