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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인사이트 Jun 02. 2024

숫자 안엔 사람들이 담겨 있다.

 


 

오랜만에 폴 칼라니티의 <숨결이 바람될 때>를 책장에서 꺼내 읽었다. 무심히 페이지를 넘기다가 한 대목에서 손길을 멈췄다. 아직 의사가 되기 전인 의학전문대학원생 시절에 폴과 그의 아내 루시는 환자들의 초음파 사진을 보면서 심전도 파형을 공부하고 있었다.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루시는 한 장의 사진에서 치명적인 부정맥을 정확히 짚어냈다.

 

그때 갑자기 루시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들이 공부하던 심전도 파형이 누구의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마도 그 환자는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폴은 이렇게 썼다.“그 페이지 위의 구불구불한 선들은 단순한 선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심실세동이 악화되어 결국 심장 수축이 멈출 줄도 모르는 상황을 보여주고 있었고, 사람을 눈물짓게 만들 수도 있었던 것이다.”

 

소방서에서 잠깐 일하는 동안 나 역시 루시와 비슷한 일을 겪었다. 내 경우에는 숫자였다. 매일 아침이면 소방서에는 각종 신문들이 배달되었고, 식사를 위해 식당에 가면 언제나 뉴스가  틀어져 있었다. 덕분에 좋든 싫든 간에 늘 세상 소식들을 접하며 살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나는 ‘숫자’들을 찾아냈다.

 

대학 새내기 시절에 친한 선배의 권유로 세월호 400일 추모집회를 간 적이 있었다. 그때 들었던 외침이 기억에 오랫동안 남았다. 텔레비전에서 떠들어대는 미수습자 9명은 단지 숫자가 아니라던 말. 우리 곁에서 살아 숨 쉬던 한 명, 한 명의 사람들이라는 말. 지금 그 배에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 하지만 그 당시에는 그 말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 의미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게 된 건 내가 소방서에서 일하게 되면서였다. 뉴스에서 알려주는 숫자들은 단지 간밤에 죽거나 다친 이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화면과 지면 위의 아라비아 기호 속에는 그들이 겪은 고통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타게 삶을 향해 반짝였던 갈망이, 기어코 꺾여버린 희망과 남겨진 이들의 상실감이 뒤엉켜 있었다. 마치 끈적한 타르처럼 말이다.

 

 


 

벌써 7년이나 흘렀다. 시시한 출동들로 하루하루를 꾸역꾸역 밀어내던 내게 충청북도의 작은 도시에서 발생한 화재 소식이 들려왔다. 어느 스포츠센터에서 발생한 불은 예상과 달리 수 시간이 지나도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뉴스에서는 연신 긴박하게 돌아가는 현장을 보도해 주었다. 나를 비롯한 직원들 모두가 마치 마법이라도 걸린 듯 작은 스크린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혹시라도 일어날지 모르는 기적을 바라며.

 

얼마나 많은 시간이 속절없이 흘렀을까. 드디어 사망자와 부상자의 숫자가 발표되었다. 37명이 다쳤고 29명이 목숨을 잃었다. 투입된 소방관의 증언에 따르면 사망자 대다수가 성별조차 확인이 불가능할 정도로 훼손이 심했다고 한다. 다만 그들 중 대부분이 2층에 있던 여성 목욕탕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그저 짐작만 할 뿐이라고 했다. 사망자 명단 중에서는 얼마 전 수능을 치르고 대학진학을 앞둔 소녀와 그녀의 어머니, 외할머니도 있었다. 한 순간에 사랑하는 가족을 모두 잃은 가장은 그대로 말을 잃어버렸다.

 

옆자리에 앉아있던 반장님은 답답하다는 듯 담배를 들고 그대로 밖으로 나가버렸다. 사무실은 숨조차 내쉬기가 조심스러울 정도로 적막했다. 이미 업무는 우리들의 안중에 없었다. 두 어깨가 아령이라도 얹어놓은 양 무거웠다. 뉴스 자막 속 선명히 박힌 숫자들은 다트가 되어 내 가슴팍을 향해 날아들었다. 숫자가 날아든 자리엔 통증 대신에 무력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나는 차라리 텔레비전을 꺼버리고 싶었다. 하다못해 채널이라도 돌려버리고 싶었다. 그것도 안 된다면 눈이라도 감아볼까 싶었다. 허나 그 사고는 그런 식으로 모른  척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딱 한 번, 화재현장에서 발생한 사망자를 본 적이 있었다. 화재조사관이 찍어온 사진 속의 망자는 몸을 한껏 웅크린 채 누워 있었다. 불에 그을려서일까. 사진 속 망자는 생각보다도 훨씬 작았다. 그래서 초라해 보이기까지 했다. 까맣게 탄 살갗은 각질처럼 거칠게 일어나 있었다.

 

징그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대신 그 자리를 연민과 서글픔이 채웠다. 미안한 감정도 들었다. 그건 내가 ‘그의 죽음에 상관이 있는가 없는가’와는 별개의 문제였다. 누군가의 죽음을 알게 된 순간부터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그 죽음에 책임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모든 사람들의 안타까운 사연에 공감하는 게 앞으로 이 생활을 계속하는데 있어서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그 책임감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지난번 우리를 상담하러 온 심리상담가는 PTSD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는 현장으로부터의 기억에서 빨리 벗어나는 게 좋다고 조언해 주었다. 그렇지만 한 사람에 대한 기억이 잊어야 한다고 해서 잊혀질 만큼 가벼운 무게는 아니지 않은가.

 

어떤 환자를 만나면 비슷한 기억들이 꼬리를 물고 따라 나왔다. 가족을 잃고 슬퍼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이전에 만난 또 다른 가족들이 떠올랐다. 숫자 역시 그랬다. 그것들은 내게 늘 어떤 기억들의 촉매제가 되었다. 잊고 싶었던, 기억하지 않고 싶었던 것들에 대해서 말이다.

 

가끔은 내가 사는 세상이 달라져 버린 듯싶다. 빛바랜 일기장의 첫 장에 나는 이렇게 썼었다. '의무소방원은 남들은 평생 겪어보지 못할 특별한 경험을 선사한다. 매 순간 재난이 자리한 그곳에서 눈물을 마주하고 절망을 목도하는 것. 누군가의 고통과 죽음에 익숙해지는 것. 사회의 가장 약하고 추한 부분을 들여다보는 것.'

 

소방서에 오기 전, 내가 살던 세상은 그런 것들과는 상관이 없는 곳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 일들은 뉴스를 통해서나 겨우 접할 수 있었고, 나는 그저 잠깐 동안 안타까워하면 그만이었다. 오히려 나는 당장에 닥쳐온 과제들을 더 걱정했을 것이다. 친구들과의 저녁 약속이 더 중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럴 수가 없다. 그러기에 나는 너무 많은 것들을 알았다. 이곳은 가난한 사람들이 더 많이 다치는 세상이다. 돈이 없어서 병원에 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 세상이다. 사람이 사람을 상처 주는 일에 거리낌 없는 세상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비극이 벌어지고 있는 세상이다. 그런 세상을 나는 여태까지 살고 있었다.

 

그리고 7년이 흘렀다. 그 해 겨울에,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어디 있을까. 사고 건물은 2020년에 철거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문화센터가 들어섰다. 사진으로 봤는데 꽤 멋진 건물이었다. 이젠 현장 근처를 지나가더라도 그날 그곳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는 사람도 거의 없을 것 같다. 잊는 게 당연한 건데, 그래야 나아갈 수 있다고 하는데 왠지 서글픈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나는 기억 속에서나마 아무도 찾지 않는 그 흉물을 다시 홀로 찾았다. 거기엔 오래전 내가 두고 간 ‘과거의 나’가 있다. 잊으려 노력했는데 그게 잘 안된다. 소방서를 떠난 후 다시 원래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내 세상은 이미 변해버렸다. 그래서 도리어 잊지 않는 게 유일한 방법이 되었다.  짓누르는 기억의 무게만큼이나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살아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를 쓰는 마음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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