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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아직도 아이돌 좋아해?

[에세이] 나의 정신 나간 사랑에게

by 아트인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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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딩 존에서 소녀들이 무 뽑히듯 뽑혀 나간다. 누구는 탈진한 듯 축 늘어진 채로, 또 다른 누구의 손에는 거대한 카메라가 들려 있다. 하지만 그녀들에게 내 시선을 오래 뺏길 순 없다. 무대 위 최애를 눈에 담기에도 모자란 시간이니까.


방금 시작한 것 같은데 벌써 마지막 곡이란다. 이대로 최애와 헤어지기 싫어 앵콜을 연신 외쳐 보지만 도무지 나오지 않을 것 같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짐을 챙겨 공연장을 나온다. 어느새 짙은 밤, 주변의 어떤 무리는 콘서트 퇴근길을 보겠다며 뛰어나간다.


난 퇴근길은 보지 않는다. 막차를 놓칠 수 없기 때문이다. 건장한 나의 최애는 매니저가 운전하는 소속사의 벤을 타고 귀가하지만, 나를 집으로 데려다줄 사람은 오직 나밖에 없다. '어차피 X(구 트위터)에 프리뷰 다 올라오니까...' 애써 위로하며 떼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 본다.


막차에 겨우 몸을 실은 나는 옆자리 취객과 행여 어깨가 닿을까 몸을 잔뜩 움츠리며 핸드폰에 머리를 박는다. 그새 X에 올라온 콘서트 영상들을 보여 아까 느꼈던 황홀감에 다시 한번 빠져본다. 영상이 끝나고 잠깐 비쳤던 검은 화면 속에는 반짝이게 세팅된 최애는 온데간데없고 땀에 절어있는 나만이 홀로 남겨져 있다.


사녹 공방은 팬들끼리 치열한 댓림을 통해 내가 당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최애 그룹의 녹화 순서가 될 때까지 기다려야만 한다. 그게 새벽이든 한낮이든 하염없이 기다린다. 기다림에 비하면 찰나 같은 순간이지만, 그 순간에도 나는 목이 터져라 응원법을 외치고 응원봉을 흔든다. 지금 내가 들고 있는 응원봉이 몇 번째 리뉴얼된 건지는 기억도 안 나지만.


음악방송 1위의 순간, 최애를 비롯한 멤버들의 글썽거리는 눈빛에 내 마음마저 일렁인다. "우리 @@(팬클럽 명) 정말 감사해요." 그 순간 나를 비롯한 개개인의 이름은 지워지고, 하나의 팬클럽명으로 통칭된다. 그래도 좋다. 최애의 소감은 '나'에게 속삭이는 달콤한 말이 되어 나와 최애 사이를 견고히 메꾼다. 너의 행복은 곧 나의 행복. 나는 이 사랑을 평생 간직하겠노라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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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박비를 아끼기 위해 당일치기로 전국 투어에 다녀오고, 최애의 생일 카페에서 커피는 텀블러에 담고 특전을 챙긴다. 예전에는 교통비를 줄여보겠다며 부산행 기차를 무궁화호로 예매했다가 콘서트장에서 내내 허리가 아팠던 이후로는 교통비에 절대 돈을 아끼지 않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해외 투어는 코로나 때문에 가보지 못했다.


코로나 시기는 그야말로 케이팝의 암흑기였다. 오프라인 행사는 줄줄이 취소되고, 최애는 폰 화면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우리 애는 분명 살아있는 사람인데, 실물을 볼 수 없으니 어째 존재하지 않는 허상 같았다. 그때부터 나는 이 실체 없는 덕질을 부정하기 위해 최애와 관련된 현물을 모으기 시작했다.


덕질에는 참 이상한 계산법이 적용된다. 나는 최애의 셀카가 담긴 손바닥만 한 종이 조각을 몇만 원, 몇십만 원에 구매했으며, 원래 앨범값보다 비싼 값을 주고 최애의 이름으로 미공개 포카 분철에 탑승하기도 했다. 내 통장은 가벼워지고 최애의 포카를 모은 콜북은 무거워졌다. 오로지 최애와 닮았다는 이유로 어릴 땐 쳐다도 안 봤던 인형들이 내 방 곳곳에 널브러져 있다. 한쪽에는 앨범 더미가 지금까지의 사랑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제 존재를 뽐낸다.


케이팝에는 무시무시한 전설 하나가 내려온다. 25살까지 탈케를 하지 못하면 평생 하게 된다고. 나는 그 수많은 사례 중 하나가 됐다. 이제는 ‘아직도 아이돌이나 좋아하고 있냐’는 말에 더 이상 마음 상하지 않는다. 그런 말에 속상해하기엔 방금 올라온 프리뷰 속 최애가 너무 예쁘다.


이 사랑에 이름을 붙인다면 뭐라 말할 수 있을까. 난 그저 현재 내 마음에 충실하고 싶을 뿐이다. 나의 최애를 실컷 사랑하고, 있는 그대로의 내 온 마음을 쏟고 싶다. 우리 엄마의 표현을 빌리자면, ‘정신 나간’ 이 사랑이 오늘의 나를 살게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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