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여행 중 클래식 피아노 독주회를 관람한 적 있다. 익숙하지 않은 장르일뿐더러 그마저도 여행 메이트의 선호로 가게 되었던 터라 흥미가 크지 않았다. 오전에 강행한 이만 보의 일정도 사기 저하에 한몫. 나, 집중할 수 있을까? 졸지만 않으면 다행이라는 마음을 갖고 연주회장에 도착했다.
공연에 관한 브로슈어보다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공연장의 풍경이었다. 나이가 지긋한 노인들이 좌석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부부 같기도, 오래된 모임의 일행 같기도 한 가지각색의 외국 할머니와 할아버지. 옷장에서 정갈한 옷을 고르고, 다림질하고, 늦었다며 재촉하고, 두 손을 꼭 잡고 이곳에 오기까지의 풍경을 상상하니 웃음이 났다.
한국에서도 목격하고 싶은 광경이었다.
조명이 어두워지고 연주가 시작되었다. 집중하지 못하리란 우려와 달리 곧바로 빠져들 수밖에 없었는데, 핸드폰을 통해선 느끼지 못했던 섬세한 음들이 곧장 귀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연주자의 들썩이는 몸, 부드러운 소리가 공간을 꽉 채웠다. 언젠가 클래식엔 가사가 없어 같은 소리에서 무수한 서사가 만들어진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그래, 이 음들로 나만의 이야기를 만드는 거다. 상상을 하자. 상상, 상상.
아아, 안타깝게도 미디어와 숏폼의 영향으로 인한 집중력 부족의 문제는 클래식 장에서도 유효했다. 40분이 넘어가는 연주 시간 동안 도저히 상상에만 집중할 수 없었다. 나만 그런 건가 주위를 둘러보니 옆 좌석의 여행 메이트는 언제부터인지 달콤한 꿈을 꾸고 있었다. 제기랄.
다른 좌석은? 맞은편에서 친구처럼 졸고 있는 아저씨를 발견했다. 그 옆 할아버지는 멍을 때리고 있었다. 리듬에 전혀 맞지 않게 고개를 흔드는 할머니도, 왜인지 고개를 좌우로 젓는 할머니도, 리듬을 타며 그루브를 젓는 청년도 있었다.
연주자에겐 죄송하지만 음악을 배경 삼아 관객을 관찰하는 게 더 재밌었다. 그들의 모습도 클래식이 자아내는 무수한 서사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니 오스트리아에서 공연을 본 건 처음이 아니었다. 유명 관광지면 반드시 있었던 거리의 악사들, 버스커의 공연이 먼저였다. 누구에게나 열려있고, 만족한 만큼의 돈을 요구하는 공연.
실력을 떠나 관객을 흡인하는 힘은 프로와 다르지 않다고 느꼈다. 오히려 그들의 음은 하나도 놓치지 않고 싶었다. 묻고 싶은 것도 많았다. 당신은 왜 이곳에서 연습 같은 연주를 하나요. 사람들이 보길 원하나요, 보지 않길 원하나요. 지금 연주하는 <인생의 회전목마>는 이곳에서도 유명한 음악인가요. 하루에 얼마를 버나요.
사실 나는 투박한 용기를 목격하고 싶었던 것 같다. 수요 없는 공급을 만들어내는 대범함도. 미숙함도 매력이 될 수 있는 관용도. 주변과 관계없이 자신을 유지하는 단단함도. 아마추어만이 낼 수 있는 순수한 미소도. 어리숙한 음률을 곱씹으며 멋대로 정의 내렸다. 버스킹이란 기꺼이 무시당함으로써 선명해지려는 것이구나. 수많은 시선을 은폐하는 힘을 기르는 훈련이구나.
아마추어에게 경외를 느끼니 자연히 프로에게도 마음이 이끌렸다. 예상할 수 없는 수많은 시선을 받기 위해 기술과 감정을 연마하는 배짱이란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노동의 결실로 세간의 숱한 평가를 감내하겠다는 의지는 그 자체로 단단한 것이다.
상상이 너무 길었었나. 어느새 모든 연주가 끝나고 끝없는 박수갈채가 이어졌다. 나 역시 크고 길게 박수를 쳤다. 감동의 박수만은 아니었다. 이 많은 사람을 주목하게 한 수행과 노력, 그것을 흡수하는 깜냥에 대한 박수였다. 이런 경탄도 클래식에선 허용되는 것이 아닐까. 여행은 이런 식으로도 새로운 세계를 허용한다는 걸 배웠다.
조용히 클래식을 음미하던 여행 메이트는 무엇을 배웠는지 묻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