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로댕 박물관의 환한 햇살이 드는 창가에는 토르소들이 줄지어 있다.
그중에서도 <등을 굽힌 젊은 여성의 토르소>가 눈에 띄는데, 그 이유는 화려하거나 특이해서가 아니다. 이 토르소는 아주 단순해서, 그래서 아름다운 조각이다.
인체의 전신을 고려했을 때, 팔다리가 없는 토르소는 부족한 상태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근대 조각의 아버지답게 로댕은 표현에 불필요한 인체 부분은 과감히 제거해 토르소를 제작했다. 그는 인물을 불완전하게 조각하는 것을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되려 표현력을 증폭시키는 데에 불필요하다고 생각된 부분, 즉 팔다리를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로댕은 가장 단순하지만 가장 아름다운 형태를 구현했다.
이는 루브르 박물관의 <밀로의 비너스> 복원 과정에서 팔은 복구하지 않기로 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현대의 기술 덕에 수많은 훼손 예술품이 원래의 모습을 찾았다. 하지만 <밀로의 비너스>는 그 원형을 알 수 없어서 복원시키지 않은 것일까?
그렇지 않다. 비너스 상의 배에서 오른쪽 팔이 붙어있던 흔적이 확인되고, 해당 조각이 발견된 같은 섬에서 비너스가 무엇인가 들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손이 발견되었다. 그녀가 들고 있던 것은 다름 아닌 그리스 로마 신화 속 비너스를 포함한 세 여신이 서로 갖기 위해 경쟁한 ‘황금 사과’였다.
즉, 복원 전문가들은 <밀로의 비너스> 상은 오른쪽 팔은 내리고 사과를 든 왼쪽 팔을 들고 서 있었을 것으로 최종 판단한다.
하지만, 이 모습이 아름다운가? 그것이 루브르 박물관 측의 질문이었다. 그들은 이 완전한 상태에서 오히려 완벽을 찾을 순 없었다. 팔이 없는 여백이 만든 절묘한 균형감, 상상력으로 채워진 조각상의 신비함, 그리고 팔이 없는 상태의 비너스상에서 영감을 받은 수많은 현대 미술 작품들을 고려했을 때, <밀로의 비너스>는 팔이 없을 때 더 아름다웠다. 그렇기에 결국 팔을 복원하지 않기로 결정 내린다.
<등을 굽힌 젊은 여성의 토르소>를 만든 로댕 역시 팔다리가 없는 몸통의 형태가 더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관객들도 마찬가지이다. 햇살이 내려앉은 로댕의 토르소를 바라보고 있을 때, 이 본원적이고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은 팔다리의 방해가 없기 때문임을 깨닫는다. 로댕은 팔다리를 배제해 관객이 집중해야 할 부분 - 허리의 곡선, 매끄러운 등줄기, 갈비뼈의 형태 - 을 정확히 짚어 준 것이다.
예술가도,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도, 가끔 완전과 완벽을 혼동한다. 혹은 완전함 그 이상을 추구하다 되려 완벽과 멀어지는 아이러니를 겪는다. 그럴 때면 미완전의 신체로 가장 완벽한 아름다움을 구현한 로댕이 되어 보길 바란다.
완벽의 미학은 때로 덜어냄에 있음을 이해할 때, 비로소 우리는 가장 아름다운 토르소를 빚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