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난 부분은 은폐하고 잘난 모습은 더 빛나게 가공하여 전시하는 시대다. 하여 남들의 구린 모습은 도무지 발견하기도, 상상하기도 어렵다. 나는 내 육체와 정신의 소유자라는 이유로 여과 없이 그것들의 비루함을 마주해야 하는데도. 화려함이 점령한 세계 속에서 습관적인 비교와 결핍감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이다.
세상이 주목하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다 보면 또 다른 욕망의 불꽃이 타오를 때가 있다. 나다워지고 싶다는 단순한 소망. 한없이 초라하기만 한 난데, 그래도 나다워지고 싶은 마음. 나다움이란 말은 그 자체로 아름답고 궁극적으로 보이니까. 별것 아닌 나로서 존재하기와 아름다움을 공존시키는 법은 아마 평생의 숙제로 남을 거다.
나다움에 관하여, 글을 쓰고 여러 사람을 인터뷰하며 목격한 법칙이 있다. 빛나는 모습은 누구든 웬만하면 흉내 낼 수 있고, 어둑한 모습은 누구든 웬만해선 흉내 낼 수 없다는 것. 나는 어둑한 모습을 ‘깊이 묻어 둔 비관’이라고 칭한다. 조금이라도 내보이면 거센 공격을 당할 것임이 분명한 태도들. 축축하고, 초라하고, 밋밋해서 마음 놓고 공개할 수 없는 사념들. 나조차도 갖고 있기 부담스러운 무거움들. 그러니까 굳이 흉내내지 않는 것들, 그러므로 웬만하면 비슷하지 않을 것들이다.
결국 비관은 좋든 싫든 오롯한 나로서의 제거할 수 없는 부분이고 비관을 끌어안는 것은 나다움의 중요한 방식이 된다. 버겁기만 한 이 마음을 나다움의 열쇠로 삼으려니 도통 어렵고 불가능해 보이지만, 그것을 실현하는 사람들이 있다.
김사월은 그런 사람 중 하나다. 자신의 취약함에 몰두하고 더욱 세공하는 사람. 불안을 어떻게 불안으로 그려낼지 고뇌하는 사람. 그러다 자기도 모르게 사랑을 이야기하게 되는 사람.
그녀의 노래를 알게 된 세월은 길지 않다. 올해 3월에 발표한 정규 4집 <디폴트>가 밀도 있게 청취한 첫 앨범이다. 김사월을 향한 짙은 사랑은 종종 들어왔는데, 얄팍한 리스너인 나도 김사월을 사랑한다고 말하는데 주저함이 없다. 불안과 아름다움을 합치하는 그녀를 어떻게 친애하지 않을 수 있는가.
‘아름답다’의 ‘아름’의 어원이 ‘안다’의 ‘앎’에서 왔다는 속설이 있대요. 정말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그 말을 좋아해요. ‘자신답다’가 ‘아름답다’의 기원일지도 모른다는 거죠.
김사월 – EBS 스페이스 <공감> 인터뷰 中
최근 인터뷰를 보고 반가웠다. 김사월의 지향점과 나의 감정이 공명했음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공연 '김사월 쇼 : 디폴트' 보고 나는 이렇게 말한 적 있다. “두려움은 어떻게 그 자체로 이토록 아름다움이 될 수 있는지. 두려움은 아름다움의 변모, 아름다움은 두려움의 아류. 두려움을 만나면 널린 재료들을 부지런히 찾아 여전히 애잔하고 분명히 예쁘게 꾸며줘야지.” 그때 나는 두려움과 아름다움이 같을 수 있다는 희망을 보고 씩씩해졌던 것 같다. 두려움으로 충만한 내가 아름다운 흑조가 될 수 있을 것만 같아서.
<디폴트> Track 1 ~ 5 가사 中 - 사랑해 주세요 그리고 버려요 내 행복을 위해 난 사랑받지 못하는 허영이 있어요 나를 버리면 나는 행복해질걸요 / 외로워 보이는 건 죄가 아니지만 외로워 보이면 더 외로워질 거야 울기 시작하면 어쩔 수 없지만 우는 당신은 더 울게 될 거야 / 시랑하는 사람들이 꼭 내가 아니어도 될 것 같아서 그 기분이 들면 아무것도 느껴지지가 않아 / 지키고 싶은 게 많은 거 그건 참 무모한 일인 걸 너도 알지 닫았던 마음도 편안했던 비관도 옛 사진에 풀려버리네 / 넌 나쁜 사람 되는 게 싫은 실은 그런 사람인 걸 근데 정말로 그래 나는 나쁜 사람도 똑똑한 사람도 될 수 있었어
<디폴트> Track 6 ~ 12 가사 中 - 사랑 없는 세상이 디폴트 그래서 매번 기뻐해야지 사랑 없는 시간들은 아프거나 외로운 슬픔이 아니야 사랑 받고 싶어 새벽녘 기도하는 마음처럼 무조건적인 사랑 그걸 다 가지고 싶어 / 안고 싶어 미안해 아프니 미안해 네가 아프다면 네가 다친다면 나는 나는 떠나서 널 슬프게 하는 널 힘들게 하는 세상을 베어버릴게 / 앞으로 그렇게 살지 말자고 하지만 살기 위해서 그렇게 살았을 뿐인데 / 그런 호수가 나를 적시네 살고 싶고 사랑에 빠지게 호수는 한 번도 나를 알았던 적이 없어 나는 그걸 복수한다고 생각하곤 하지 / 가을 장미가 피네 찬란할 것도 없이 매해 피어나면 되니까 아쉬울 것 없지 / 가끔씩은 여기가 어딘지를 몰라 오 살아있다는 걸 믿을 수 없지 빛나는 모든 것들을 떠올리면 나아질까 세상 모두가 나를 사랑해 준다 해도 네가 사랑해 주지 않음 소용없어 / 내 눈물이 모두 흘러내리면 울던 휴지로 꽃을 접어줄게
그녀의 가사는 상승보다는 침잠하기 위해 애쓰는 언어다. 무엇이 됐든 자신의 정수에 맞닿아보려 한다. 그리고 되새김질한다. 이 거친 재료들로 어떤 말을 뱉고 어떤 행동을 할 수 있는지. 언뜻 사랑과 대척점에 있는 비관 덩어리처럼 보이지만, 그녀는 그 자체로 이미 사랑을 말하고 있다. 아니 또 다른 사랑을 발굴했다.
세상엔 이런 마음도 있다고 드러내는 건 결국 어떤 세계를 포용하는 일이고, 그렇게 누군가 발 디딜 수 있는 세계를 마련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가 겨우 건져냈던 ‘사랑’이란 단어는 엄청난 밀도를 가진 것만 같다. 어떤 화려한 껍데기에 쌓인 사랑보다 정직한 것 같다.
김사월이 확장한 사랑의 정의에 포함되는 이들을 떠올린다. 삶과 사랑의 자격에서 박탈되었던 아무개들. 스스로가 그 아무개라고 느껴질 때마다 아름다운 사랑엔 자격이 없다는 걸 그녀를 보며 믿게 된다. 못난 나를 품어도 아름다워질 수 있을 거란 믿음이 흔들릴 때마다 그녀의 가락을 듣게 된다.
최근 그녀의 정규 1집 <수잔>이 대중음악 전문가 11인과 EBS 스페이스 공감이 선정한 2000년대 한국 대중음악 명반 100에 선정되었다. 자신을 투영한 ‘수잔’으로 세상과 접속하려 분투했던 흔적이다. <수잔>을 시작으로 <로맨스>, <헤븐>을 거치며 자신과 세상 사이에서 줄다리기한 그녀의 행보는 꾸준하면서도 묘하게 달라지는 것 같다. 여전히 비관을 품지만, 비관을 토양 삼아 피워낸 사랑도 또렷하게 품으면서.
비관을 수호하는 사월의 노래가 계속 흐르길 바란다. 그녀가 말한 것처럼, 자신의 눈물이 모두 흘러내리면 울던 휴지로 꽃을 접어주는 일을 멈추지 않길 바란다. 분명 아픈 일이지만 그것만으로 치유 받을 수 있는 누군가를 위해, 아마 그러할 자신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