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애프터양
생명은 유한하고 우리는 이별을 끝없이 마주하다 스스로와의 이별로 생을 맺는다. 이별에 경중은 있어도 슬픈 건 매한가지이다. 어떤 이별은 본인을 파괴할 만큼의 힘을 가지기도 한다. 어떻게 이별해야 할까.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어떻게 잘 보내줄 수 있을까. 오늘 소개할 영화가 그 답에 힌트가 줄 수도 있겠다. 코고나다 감독의 애프터양을 소개한다.
제목 애프터 양의 ‘양’은 안드로이드 인간의 이름이다. 제이크는 입양한 딸 미카에게 문화적 배경을 설명해 줄 양을 구입했고 그는 처음의 ‘기능’을 넘어 미카의 소중한 오빠가 되었다. 하지만 어느 날 양은 작동을 멈췄고 영화는 그 이후, ‘애프터 양’의 시간을 비추며 진행된다.
갑작스러운 이별 후, 가족에게 여파가 조금씩 찾아온다. 미카는 학교에 적응을 못 하고 양이 언제 고쳐지는지 제이크에게 계속 묻는다. 회사에 다니는 카이라 대신 제이크는 수리 업체를 찾아다닌다. 폐기하겠냐고 묻는 본사 수리업체를 나와 사설업체로 간 제이크는 양에게 기억장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의 단기 기억을 열어본 제이크는 양의 시선을 마주한다.
떨어지는 빗물, 미카의 모습, 제이크와 카이라의 다정한 한때. 아주 일상적이기 때문에 아름답고 당연한 기억을 양은 매일 매일 기억하고 있었다. 양의 기억에서 나온 제이크는 잠시 가만히 있는다. 너무 아름답고 슬픈 장면들을 보아서일까.
이별의 순간들은 아프면서도 반짝인다. 고통으로든 해방으로든 이별은 새로운 시작이 되고, 우리는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된다. 이별과 시작, 이 모순적인 단어는 언제나 함께이다. 지나온 시간이 생각나고, 슬픔을 감당하지 못하는 기간은 그 너머로 가는 탈피이기에 고통이 수반된다.
제이크의 태도는 내내 모순적이다. 자신도 양을 ‘구매’했지만 옆집에 사는 복제인간들과는 거리를 둔다. 양의 죽음 직후에도 슬픔보다는 미카를 위해 양을 고쳐야 한다는 의무감이 느껴진다. 영화의 배경은 먼 미래이지만 이런 모순에서 우리를 보는 듯한 기시감을 느낀다.
너와 나를, 우리와 너희를 분리하고 우월감을 느끼는 것. 인간과 인간 아님을 판단하는 제이크의 편견에서 느껴지는 불편함은 제이크가 아이다에게 묻는 “양이 인간이 되고 싶었나요?”라는 질문에서 강하게 느낄 수 있다. 인간이 무엇보다 우월하다는 그 오만함을 클론 아이다는 “왜 인간은 모든 존재가 인간이 되길 원한다고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답한다.
양의 장기 기억을 차지하는 에이다는 영화 후반에서야 등장한다. 에이다의 복제인간은 양의 그리움의 현신이다. 에이다의 죽음 후 다른 가정에서 적응하지 못했다는 전사가 뒤늦게 밝혀진다. 숲처럼 빽빽한 양의 기억을 따라갈수록 로봇이라는 정체성은 흐려지고 그저 ’양‘ 자체의 삶을 상상하게 된다.
그렇다. 사실 이 이별에는 양이 로봇이라는 점 외에는 다른 점이 없다.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고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만이 있을 뿐. 하지만 로봇이라는 이유가 애도하는 길을 더욱 길게 만든다.
제이크는 처음 양의 수리를 맡기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폐기를 하기에는 미카의 얼굴이 어른거리고 사설업체에 맡기기에는 묘한 찝찝함이 남는다.
그러던 중 마주한 양의 기억 속에서 양과의 대화를 떠올린다. 차에 관해 이야기하며 미소 짓던 순간을 양의 기억으로, 그리고 제이크의 기억으로 두 번 바라본다. 그 기억 속 제이크는 차에 매료된 이야기를 술술 내뱉는다. 가정에도, 일에도 시종일관 무표정을 짓던 것과 다르다.
제이크와 카이라는 이별을 받아들이는 데에 서툴러 보인다. 처음에는 미카를 위해 양을 고치려 하지만 고칠 수 없다는 것을 눈치챘음에도 주저한다. 양을 고치려는 대상으로만 보면서도 왠지 미련이 남아있어 보이기도 한다. 양의 시선이 준 그 따스함이 느껴졌기 때문일까.
제이크와 카이라는 양이 미카의 오빠이자 그들의 가족이었음을 깨닫는다. 제이크는 양이 바라보던 나무를 바라보고, 카이라는 양의 책상에 앉아 각자의 방식으로 가족인 그를 애도한다.
이에 반해 미카는 울고 부르짖으며 그 안의 슬픔을 토해낸다. 학교에서 친구와 싸우고, 양의 안부를 계속 묻고, 양과 끝까지 함께하면서. 영화의 가장 마지막, 미카는 양의 방으로 찾아간다. 조용히 마지막 인사를 하는 미카의 모습은 슬프지만 의연해 보인다.
가족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이별을 하고 이전과는 달라진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양이 떠난 후에 그들에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
이별은 늘 그렇다. 똑 떨어지는 것 없이 어떤 날은 작은 파편이라도 찾아다니고 다른 날은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보낼 수 있다. 그런 날의 무수히 반복하고서야 우리는 이별한다. 없던 것처럼은 아니라 계속해서 그 시간을 반복하면서. 하루, 일주일, 한 달… 조금씩 덮어가며.
나도 완전한 이별을 늘 생각하지만, 그런 것은 없다는 걸 알고 있다. 사람은 나약하고 미련하기도 해서 사랑도 미움도 쉬이 버리지 못한다. 하지만 그것이 나쁜 것은 아닐 테다. 미카의 푹 적셔지는 이별처럼 충분히 애도하는 그 시간이 우리에게는 가장 아프고 건강한 이별의 방식일지 모른다.
애프터양은 다양한 이별의 유형을 제시한다. 제이크와 카이라의 서서히 젖어 드는 이별, 미카의 장마 같은 이별, 에이다의 담담하면서도 충실한 이별까지. 그들이 양을 보내는 방식을 관객으로 보며 나의 이별을 생각했다. 충분히 비워낸 이별을 했는가. 나는 어떤 이별을 해왔는가.
이별에 옳고 그른 것은 없지만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이별의 첫 단추이지 않을까 싶다. 사라진 것에 애도를 표하고 그 후 남은 것들을 마음에 담는 것. 그것이 우리가 이별에 기대는 희망이자 우리에게 이별이 찾아오는 이유 아닐까 조심히 미루어본다.
문득 당신의 이별은 어때 왔는지 묻고 싶다. 그리고 그 이별들이 당신들에게 무엇을 남겼는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