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한 번쯤은 내가 아닌 타인이 되어보기를 꿈꾼다. 이때, 내가 되고 싶은 타인은 대부분 나보다 상황이 조금 더 나은 누군가일 경우가 많다. 내가 만약 부자가 된다면, TV에 나오는 화려한 스타가 된다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하는 누군가가 된다면과 같은. 허황되고도 지독히 욕망적인 망상 말이다. 그러니까 결국, 내가 되고 싶은 누군가는 사실 내가 바라는 나의 모습을 닮아 있으며, 그는 결국 더 나은 버전의 ‘나’인 셈이다.
연극, 영화, 문학과 같은 예술 장르를 통해 우리는 언제나 ‘타인되기’ 경험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살아간다. 이때의 ‘타인되기’란, 허구의 이야기 속 타인을 통해 완전히 새로운 상황을 경험하거나, 허구의 이야기를 경유하여 실제 나의 삶에 도달하는 체험을 일컫는다. 그 때문에 예술 장르 향유를 통한 ‘타인되기’는 외부의 어떤 것, 즉 나라는 주체가 이루어놓은 주변의 상황과는 전혀 다른 상황의 이질감을 경험하여 나라는 자아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한다. 이러한 자아의 체험은 타인을 경유하여 결국 더욱 진실된 ‘나’로 도달해야만 하는 도달점이 정해진 여정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여정의 도달점이 결국 내가 아니게 된다면. 더욱 진실한 나의 자아를 찾기 위해 경유했던 타인의 육체가 나의 자아를 붙들게 된다면. 그 자아의 주체는 과연 누구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 험난한 자아 찾기의 여정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되고 싶은 ‘나’가 아니라, 되고 싶은 ‘그’가 되어버린다면, 나는 과연 나라고 말할 수 있을까?
영화 <존 말코비치 되기>의 크레이그는 인형사이다. 나름의 철학을 담은 인형극을 구성할 만큼 인형극에 열성적인 그이지만, 가족을 부양할 수 없을 만큼 생활고에 시달리게 된 그는 인형극을 접어두고 새로운 회사에 취직하게 된다.
그렇게 입사하게 된 회사는 어딘가 이상한 구석이 많다. 마치 판타지 소설에나 나올 것 같은, 7층도 8층도 아닌 7과 2분의 1층에 위치한 사무실과,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직원들, 그리고 만나게 된 아주 매혹적인 동료 여사원 맥신까지. 하지만 개중 가장 이상하고 매혹적인 것은 사무실 한편에 위치한 ‘타인의 의식에 진입할 수 있는’ 어두운 통로이다.
이 통로를 지나가는 누군가는 유명 영화배우 ‘존 말코비치’의 내면 의식으로 향하게 되며, 약 15분간 존 말코비치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볼 수 있게 된다. 크레이그와 맥신은 이 포털을 통해 ‘15분간 존 말코비치 되기’ 사업을 꾸리게 되지만, ‘존 말코비치’의 의식 세계를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에 점차 사로잡힌 크레이그와 주변인들은 이를 탈취하기 위한 우여곡절을 겪는다.
앞서 언급했던 예술 장르 향유를 통한 ‘타인되기’와 <존 말코비치 되기>의 ‘타인되기’는 많은 부분에서 차이가 있다. 영화 속 ‘타인되기’는 여러 명의 타인이 존 말코비치라는 한 사람의 육체로 이동을 원하게 되는데, 이때 이들의 니즈는 ‘존 말코비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존 말코비치의 상황을 이용하여 도달할 수 있는 ‘더 나은 내가 되는 것’이다.
예술 장르의 ‘타인되기’가 결국 타인이라는 미지적인 세계를 경유하여 결국엔 진실한 나로 도달하는 과정을 거친다면, <존 말코비치 되기>의 ‘타인되기’는 타인의 미지적인 본질과는 관계없는, 지극히 ‘나’에게만 몰두한 욕망적 자아의 일탈인 것이다. 때문에 영화의 ‘타인되기’는 타인을 경유한다기보단 타인을 이용하며, 그 여정을 통해 도달하게 되는 지점도 나라는 총체적 자아이기보단 나의 ‘욕망적’ 자아이다.
하지만 자아와 욕망이 동일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터. 모든 성공과 실패, 그리고 그가 수반하는 양가적이고도 복잡한 감정의 총체가 자아라고 한다면, 영화의 인물들이 존 말코비치가 되는 경험을 통해 얻는 도달점은 결국 개인적 욕망에의 실현뿐이다. 이때 존 말코비치라는 한 명의 영화배우의 자아는 이에 접속하는 자들에겐 고려되지 않는 사항이며, 단지 그는 껍데기의 역할을 할 뿐이다. 결국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존 말코비치’가 아닌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전지적인 존재의 나‘이다.
그의 몸에 들어가 본 누군가들은 그가 되어보니 나라는 사람을 이제야 알 것 같다며, 그를 통해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듯 환희에 젖은 얼굴을 한다. 타인이 되어보고서야 알게 되는 나의 존재. 그럴듯한 철학적 사유 같지만, 사실 그들의 ‘타인되기’가 도달한 곳은 그들의 진정한 자아가 아니라 욕망이라는 것을, 그것을 깨닫지 못한 누군가의 말로는 결국 타인의 육신에 가둬진 ‘나‘라는 영혼의 영원한 구속이라는 것을, 영화 속 누군가들은 끝까지 이를 깨닫지 못한 채 스스로를 버리고 기꺼이 타인의 일부이자 자신의 전부가 된다.
존 말코비치의 몸을 경유하였고, 그가 되기를 미친 듯 갈망하였지만 결국 자신으로서 살기로 다짐한 누군가는 자신의 이름으로, 자신의 고유한 자아로, 자신이 사랑하는 누군가와 함께 살게 되지만, 끝까지 내가 아닌 누군가가 되기를 바랐던 누군가는 영원히 타인의 인식 속에 갇혀 그들을 부러운 듯 바라보고 있다. 욕망은 자아가 아니다. 그토록 바라던 빛나는 나의 존재는, 내가 나일 때만 유효한 것임을 또다시 깨닫는다. 내가 나로서 더 나아지고자 한다면, 내가 해야 할 것은 인형극의 가면을 쓰는 것이 아닌 가면을 벗고 맨얼굴을 드러낼 용기를 내야 한다는 것 또한.
명심하라, I가 U보다 먼저다. 항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