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와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다. 제아무리 친하고 아끼고 사랑하는 이가 있어도, 자기 자신보다 가까이 할 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나의 취향과 생각에 귀 기울여 스스로를 한평생 행복하게 만들어주어야 한다.
그동안의 시행착오 끝에 또 타고나기를, 다듬어진 나의 취향은 적당히 오래된 것들과 새로운 것들, 자연과 사람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한다. 치우치지 않고 그 적정선을 유지하려 애쓰는 와중에 어느새 일 년이 지나간다.
너무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을 음미하고자 24절기마다 소소한 의례를 지킨다. 정월대보름에는 부럼을 깨물고, 동지에는 팥죽을 먹는다. 하지에는 이를 귀엽게 변형시켜 팥빙수를 먹었다. 이런 놀이가 마땅치 않은 우수, 경칩, 백로, 한로 등 수많은 날들은 이름의 의미를 되새기며, 오늘 날씨와 잘 맞는지 생각해본다. 농부의 마음에서 자연이 순탄하게 흘러가고 있음을 확인하는 것은 내 생활에 큰 걱정이 하나 줄어드는 중요한 순간 일 테니.
이런 맥락에서 제철 음식을 챙겨먹는다. 봄에는 봄나물과 쭈꾸미, 여름에는 복숭아와 오이, 토마토, 가을에는 수없이 많은 식재료가 나온다. 이렇게 일년을 보내면 어느새 다시 낮이 길어지는 춘분이 온다.
여기에 나만의 재밌는 규칙을 하나 더했다. 지역 특산품을 제철에 그곳으로 가서 즐기기. 다가오는 가을에는 공주에 가서 밤을 실컷 먹으려한다. 이러다보니 자연스레 여행을 자주 가게 된다. 여행을 갈 때도 마찬가지. 그때 그 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을 보러간다.
지난 여름에는 연꽃이 만개한 부여를 다녀왔다. 부여의 궁남지는 백제 무왕이 건설한 왕궁의 정원으로, 드넓은 공간에 연꽃이 가득 피어난다. 연꽃은 오전에 피어있기에, 아침잠을 일찍 깨우고 연꽃향을 맡았다. 또한 7월 초에만 생연꽃으로 차를 즐길 수 있어 우리만을 위해 핀 연꽃으로 차를 우린다. 이렇게 연꽃하면 떠오를 순간이 생겼다.
어떻게 보면 뻔하다. 가장 좋고 사람 많은 때에 여행가기.
그러나 여행을 매일 갈 순 없다. 그래서 내가 살고 있는 서울에서도 매일 여행자의 마음으로 살아간다. 봄에는 석촌호수, 여의도로, 여름에는 야경이 보이는 시원한 테라스로, 가을에 창덕궁 후원으로. (치열한 예약을 뚫고 성공한다면 말이다.) 또 남산과 덕수궁에서 노란 빛으로 물든 은행나무 아래를 거닌다. 겨울에는 눈이 내린 아침에 종묘를 찾아 정적을 즐기고, 크리스마스 시즌 화려하게 빛나는 조명과 트리를 보며 서울광장, 명동성당을 지나간다.
굳이 이런 공간을 찾는 이유는 추억을 만들어 시간을 늘려 보려함과 동시에 사람들의 밝은 웃음소리가 가득하고 누구나 삶을 즐기는 곳에서 나 또한 그렇게 되고 싶기 때문이다.
자연의 시간만이 전부가 아니다. 예컨대 나에게 봄은 아름다운 벚꽃이 흩날리고 야구가 시작하는 계절이다. 야구장은 도심 속에서 푸른 잔디를 만끽하며 숨 쉴 수 있는, 또 밝은 조명이 서있고 사람이 붐벼 정신없는 상반된 매력이 뒤섞인 공간이다.
4월부터 10월까지 월요일을 제외한 모든 날에 야구를 한다. 가을이 되면 우승을 위해 가을야구가 진행된다. 우리의 간섭없이 그때에 피어나는 꽃과 달리, 스포츠는 인간이 만들어낸 규칙에 의존한다. 자본에 기대고 관람자가 필요하다. 시청자 외에도 해설자, 중계자, 감독, 코치, 선수, 티켓판매인, 구단운영자, 협회관리자, 시설물관리자 등 수많은 사람과 엮여있다. 하나의 사회이고 시스템에 의해 매일매일 움직이는 모습은 정확한 시간을 가리키는 시계같다. 이렇게 매일매일 야구에 울고 웃다보면 또 일년이 지난다.
이외에도 직업적 특성상 때에 맞춰 전시를 쫓아다녀야 한다. 또 독서와 영화감상이라는 평이한 취미까지 곁들이면 어느새 한 살이 추가된다. 너무 많은 기억과 감상에 젖어 모호해지지 않기 위해 다꾸(다이어리 꾸미기)까지 곁들인다. 바쁠 때 대충 휘갈기거나, 스티커로 점칠되고 또 투박하게 볼펜으로만 작성하더라도 혼자만의 시간을 할애해 내가 어떤지 살펴보는 절차이다. 이렇게 소화까지 마치고 나면 비로소 나의 타이밍을 맞춰야하는 까탈스러운 취미들이 내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