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많은 예술 작품 속 주인공은 대부분 비슷한 사회적 속성을 지녔다. 이성애자이고, 성인이고, 비장애인인 남성이 일반적으로 등장했으며 조합이 식상하다 싶으면 나름의 특색을 꾀하기 위해 여성 인물을 한두명 즈음 끼워 넣는게 전부였다. 과한 일반화라고 지적할 수 있지만, 얼마 전까지 인기를 끌었던 [어벤저스]의 구성원을 한 명씩 떠올리다보면 어느 정도 납득이 갈 것이다.
그러나 현대 예술 작품 속 주인공들이 지닌 속성은 과거와 달리 다채롭다. 다양한 모습을 지닌 여성, 장애인, 퀴어, 노인은 물론이거니와 자연 재해나 사고에 휘말린 참사 피해자에서 모티브를 따오기도 한다. 그렇게 창조된 주인공들은 당당하게 작품의 일면에서 자신만의 서사를 과감히 드러내 우리에게 큰 울림을 선사한다.
생각해보면, 자신이 직접 겪지 못한 세계와 인물을 창조해 허구의 서사를 만든 뒤 그 안에 전하고자 하는 의미를 담아 수용자에게 전달하는 것이 창작자의 본분이다. 그렇기에 다양한 계층과 이념 지향성를 지닌 현대적 주인공들의 등장은 예술계를 뒤흔드는 변혁이 아닌, 예술의 본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충실히 노력한 결과일 뿐이다.
그렇다면 현대의 창작자들은 자유로이 인물들의 속성을 설정하여 아무런 제약 없이 서사를 만들어 나가고 있을까? 혼자 쓰고 혼자 읽는다면, 가능한 가정일 것이다. 그러나 프로라면, 내가 만든 서사로 수용자의 마음을 움직이려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이 한계점에 한 번쯤은 봉착할 것이다.
창작을 가로막는 장벽으로도, 소수자의 인권을 보호하는 방패로도 작동할 수 있는 양면적 요소이자 앞서 언급한 프로 창작자의 한계점은 바로 ‘당사자성’이다. 이 당사자성은 무엇이고 예술 작품 내에서 어떻게 기능하는지와 화두로 떠오를 수밖에 없는 이유를 김병운 소설가의 단편, [한밤에 두고 온 것]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자.
필자는 어렸을 때부터 퀴어 예술 작품을 접하며 성장해왔다. 어린 시절에는 와난 작가의 웹툰 [어서오세요, 305호에]를 재미있게 읽었고 장성하고 나서는 다양한 퀴어 영화와 박상영 작가의 소설들을 읽으며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나는 이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퀴어 작품을 접했다는 것, 이 하나만으로 감히 머릿속으로 퀴어들의 세계를 구성하고 규정 짓으며 상상을 그려나가게 된다.
수용자가 예술 작품을 즐기는 행위는 작품의 세계관과 수용자의 세계관이 접하는 순간으로 치환될 수 있다. 그렇기에 사실과 다르게 과장된 등장인물을 작품 속에서 접하게 된 수용자는 등장인물의 모티브가 되는 현실의 대상을 작품에서 표현된 것과 동일하게 인식하는 오해를 범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인식과정은 단순히 서사의 재미를 살리기 위해서나 극적 긴장감을 고조하기 위해 사회적 소수자의 요소를 ‘소비’하면서 발생한다. 이 과정에서 등장하는 사회적 소수자의 속성을 지닌, 대상화 된 인물들은 도구적으로 사용되고 그 소임을 마친 뒤에는 극의 진행을 위해 자연스럽게 퇴장하게 되는 것이다.
앞서 이야기했던 것들을 종합하면, 창작자는 극의 재미를 위해 사회적 소수자의 속성을 지닌 인물을 사실과 다르게 창작하여 가볍게 소비했고 이를 받아들이는 수용자는 작품에서 내건 이미지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 즉, 작품에서 드러난 허구의 사회적 소수자를 접한 수용자는 작품 속 묘사를 실제 그들의 모습으로 곡해하여 대상화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실. 작품의 수용자는 특정할 수 없기에 흥미를 위해 대상화되어 소비된 인물, 그것의 모티브가 된 당사자한테까지 예술 작품은 뻗어나간다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이 당사자는 창작자에게 불만을 터뜨리며 저마다 다른 각자의 언어와 행동으로 분노를 표한다. 표현은 각자 다르겠지만 이 분노가 공통적으로 질책하는 것은 작가의 결여된 당사자성이 될 것이다.
해답을 내놓을 것 같은 소제목이지만, 그런 건 없다. 누군가 이 문제에 대해 교과서 같은 답을 제시한다면 좋겠지만 수능 이후의 세상에는 해설지 따위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알아가기 위해 노력하고 생각해나갈 뿐이다.
내가 당사자성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 계기는 김병운 소설가의 단편, [한밤에 두고 온 것]을 읽게 되었기 때문이다. 김병운의 소설은 다른 퀴어 문학에 비해 퀴어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더욱 묻어나는 특징을 지닌다. 단순한 성적 지향을 넘어서, 퀴어 당사자로서 접하는 세상과 인물들에 대한 주인공의 성찰을 작품 곳곳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러한 작품들 중 하나인 [한밤에 두고 온 것]에서는 퀴어 당사자성에 대한 작가의 깊은 고민이 담겨있다.
[한밤에 두고 온 것]의 주인공은 단역 배우로 퀴어 영화를 제작하는 감독의 출연 제의를 받으나 그는 감독이 퀴어 당사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제안을 탐탁치 않아한다. 헤테로가 퀴어의 사랑을 다루는 것은 그저 퀴어를 대상화할 뿐이라며, 강한 불만을 표하던 주인공에게 희곡 낭독 수업의 수강생인 안부현이 도움을 청해온다.
안부현의 부탁은 성공한 옛 친구에게 얕보이지 않게 희곡 낭독 수업의 강사인 주인공에게 자신의 아들 역할을 해달라는, 다소 무리한 내용. 주인공은 부담을 느끼지만 안부현을 도와주기로 한다. 안부현이 옛 친구와 만나기로 한 날, 주인공은 안부현과 약속 장소에서 옛 친구를 기다리지만, 그녀는 끝내 나타나지 않는다. 안부현은 주인공에게 그녀와의 인연을 설명하며 그녀와의 사이가 친구가 아닌, 연인사이 였음을 밝힌다.
안부현이 동성연인을 배반하고 현실에 쫓겨 남성과 결혼한 사실을 알게 된 주인공. 그는 큰 깨달음을 느끼고 감독의 출연 제의를 수락한다.
이는 주제에 벗어나지 않기 위해 생략한 [한밤에 두고 온 것]의 줄거리이다. 작품에서 주인공이 안부현에게 개인적인 부탁을 받지 않고, 마지막 수업을 끝으로 그녀와의 인연이 종료되었다면 그에게 안부현은 흔한 헤테로 중년 여성으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당연하다. 주인공은 퀴어 당사자일 뿐 독심술을 쓰는 능력자는 아니니까. 그러나 주인공이 안부현의 부탁을 들어주며, 그녀가 과거 동성 연인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과정을 겪으며 겉으로 드러나는 대로 타인의 마음을 판단하던 주인공은 큰 수치심을 느끼게 된다. 겉으로 당사자여도, 혹은 당사자가 아니라도. 그것은 단순히 드러난 요소일 뿐이다. 주인공은 안부현의 과거사를 들으며 이를 깨닫게 된다. 그렇기에 주인공은 자신을 캐스팅하려 한 헤테로 영화감독에 대한 불만을 철회하고 반성의 의미로 타인을 깊게 이해하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단정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창작자가 지니는 사회적 속성보다 작품에서 사회적 소수자를 표현하는 방식이 당사자성을 판정하는 주요한 지점이 된다는 것을 소설의 결말로부터 전달 받게 된다.
그러나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오로지 독자의 몫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당사자성을 이해하는 여러 방법 중 하나의 슬기로운 방향을 제시했다는 것에서 큰 가치를 지닌다.
당신이 현대 사회의 창작자라면, 혹은 창작자가 되고 싶다면. 창조보다 이해가 앞서야 할 것이다. 이미 이해가 고려되지 않은 창조로 많은 이들이 고통을 받았다. 이제는 치유의 시간이 되어야 한다. 머리 아픈 창작자의 고뇌가 당사자성을 고려하기 때문임을 바라며 글을 마무리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