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전에 〈스킵과 로퍼〉라는 애니메이션을 본 적이 있다.
도쿄에 있는 고등학교에 다니는 1학년 학생들의 우정과 성장을 다루는 이 작품은 고작 이십삼 분짜리 에피소드 열두 개로 이루어져 있음에도 좋은 장면이 참 많았다. 남자 주인공인 시마와 여자 주인공인 미츠미가 동물원에서 데이트를 하는 장면은 너무 귀여웠고, 시마가 아역 배우 시절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다시 연극 무대에 서는 장면은 감동적이었다.
그런데 정작 마음에 가장 깊이 박혔던 장면은 따로 있었다. 그건 바로 마지막 에피소드의 끝부분에서 학교가 끝난 뒤 집으로 돌아가던 시마가 미츠미에게 “내일 보자!”라고 인사를 하는 부분이었다.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지극히 일상적인 이 말이 이상하게도 너무 좋아서 며칠 내내 이것에 대해 계속 생각했다. 겨우 네 음절짜리 문장 속에 미츠미와 만날 내일을 기대하는 커다란 마음이 들어가 있다는 사실이 좋았던 것 같다.
드라마 〈대도시의 사랑법〉을 볼 때도 마찬가지였다. 좋은 장면이 정말 많았는데도 결국 나에게 가장 큰 울림을 주었던 건, 소원을 적어 날린 풍등이 불에 타서 떨어지는 바람에 풀이 죽어 있던 영에게 규호가 손깍지를 끼며 “가자.”라고 나직이 말하는 장면이었다.
도대체 ‘가자’라는 말 한마디에 무슨 힘이 있길래 영은 마치 규호와 영원히 함께일 것처럼 그를 따라서 발걸음을 옮기는 걸까.
그건 아마도 두 글자의 짧은 말 속에 ‘내가 너와 함께하겠다’는 규호의 따뜻한 진심이 들어있었기 때문이겠지.
날이 추워진 탓인지 누군가가 나와 무언가를 함께 하고 싶어 한다는 것, 그리고 그 마음을 말로 표현해 준다는 것이 요즘 들어 부쩍 당연하지 않은 일처럼 느껴진다. 그런 의미에서 예전에는 한 번도 의식해 본 적 없는 청유형 문장들이 이렇게 자꾸 마음을 울린다.
사실 청유형 문장은 별것이 아니다. 동사의 어간에 청유형 어미 ‘-자’만 붙이면 된다. 하지만 그 작은 변화 하나로 ‘너’와 ‘나’는 ‘우리’가 된다.
세상에는 영원한 것이 없지만, 그 작은 말 하나가 ‘우리’가 ‘우리’인 것이 언제까지나 계속될 수 있을 것만 같은 안정감을 준다. 그전까지는 평범하고 밋밋하기만 했던 동사를 순식간에 엄청난 의미가 담긴 말로 바꿔놓는 걸 보면, 소박한 청유형 어미는 그 어떤 말보다 거대한 힘을 지닌 게 분명하다.
내가 가장 최근에 들었던 청유형 문장이 무엇이었는지, 그런 말을 언제 누구와 마지막으로 주고받았는지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앞으로는 그 말을 더 자주 하고, 더 자주 듣는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