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주 전에 점을 뺐다. 피부과에 가서 접수를 하고 점 개수를 세고 결재를 하고 얼굴 군데군데 점을 하얀 펜으로 동그라미 친 채 사진을 찍었다. 마취 크림을 누군가가 와서 쓱싹 발라줬고 침대에 누우니 몇 번 레이저를 쏘고 끝났다고 했다. 할인가 점 10개에 4만원. 상처 연고를 바르고 아문 후에는 흉터 연고도 발라야 하고…. 생각보다 지킬 게 많았다.
점은 3년 전쯤 생겼다. 비타민D가 부족하다며 선크림 없이 산책을 매일같이 했는데 알고 보니 선크림을 발라도 비타민 합성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렇게 그을린 피부와 점 여러 개를 얻은 여름을 보냈다. 새로운 점들이 마음에 들었다. 아무것도 없이 밍숭맹숭하던 피부에 자리 잡은 개성 같아서 어느 순간 자기 전에 거울로 그 점을 한 번씩 보곤했다. 한때는 마음에 들었지만, 시간이 지나 기척 없이 점이 질렸다. 그렇게 점을 빼려고 했을 때 나만의 개성을 굳이 없애는 것 같아 괜히 기분이 이상했다. 점을 뺀 이후에는 (당연히)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고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웃겼다. 그 마음에 대해 생각하다가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늘 나다워지기를 바라왔다. 선택해야 할 때마다 나만 세상에서 똑 떼어내서 어떤 걸 하고 싶은지가 중요했다. 그렇지만 막상 세상과 나를 분리하려면 달고나 뽑기 같아서 공들여보아도 손잡이 없는 우산이 되기도 하고, 조각난 별이 되기도 했다. 이 결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뽑기 모양은 어려워지는 기분이었다. 사회적/문화적 영향이 나의 일부분이란 것을 인정하면서도 신선한 일을 하고 싶었다. 아마 그때 믿었던 나다움이란 독특함을 추구하는 것이었을까. 돌이켜보면 당시에는 지금의 내가 미래의 나와 동일 인물이라고 여겼다. 현재의 결정이 오랫동안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판단 아래 실수하지 않고 최고의 선택을 하고 싶어 전전긍긍하기도 하기도 했다. 가장 단적인 예시로는 학창 시절 한 진로 결정이 떠오른다. 하지만 그때 내가 했던 결정 중 어떤 것도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 있지 않다. 심지어 그렇게 두려워한 실패한 결정들은 어느 순간 도움이 되기도 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 그를 이해하는 좋은 바탕이 되어주기도 한다. 이런 경험이 쌓이다 보니 이전에 가진 많은 믿음들을 버리게 되었다. ‘나다움’에 대한 막연한 갈망도 사라졌다.
하지만 성인이 되고 다양한 삶들을 마주한 순간, 나는 한 번 더 그 굴레에 빠졌다. 학교라는 틀 안에서 벗어나자 응당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 모든 게 그렇지 않았다. 여행을 다니면서 만난 다른 지역, 다른 국가의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다르게 살고 있었고 늘 확신에 찬 모습이었다. 두려워하지 않고 척척 나아가는 모습이나 당당하게 말하는 그들에게 충격을 받았다. 최고의 선택을 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은 마음속에 잘 자리 잡았지만, 여전히 선택함에 부담이 있었다. 그래, 자신이 누군지 알고 턱턱 결정하는 것이 방법이구나’ 하며 다시 확신을 가지려고 했지만, 이 믿음 역시 무참히 깨졌다. 왜냐하면 내게는 너무 단단해 보이는 그들도 선택 후를 책임질 뿐이라는 걸 느꼈기 때문이었다. 가끔 후회도 하지만 이왕 시작한 거 잘해 나가자는 그 태도가 나에게는 크게 다가왔다. 늘 확실한, 보장된 선택을 하고 싶던 욕심도 이해했다. 그리고 그럴 수 없다는 것도 역시 이해하게 됐다. 나의 대지에 살고 싶다는 욕망은 자연스럽지만, 그 대지를 어떻게 찾을지는 잘 몰랐던 것 같다. 좋은 자리를 찾아 떠나는 유목민의 입장에서 자꾸 정착하려고 하는 모순적인 태도였다. 변화하는 상태 자체가 나이지 고정된 나다움은 정말이지 절대 도달할 수 없는 것인데 말이다. 발산하다 보면 소진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그때그때 판단을 바꾸기도 하면서 적응을 해가는 재미를 나는 잘 몰랐었다.
그 깨달음은 오히려 나를 정말 ‘나다움’에 가깝게 만들었다. 타인의 시선이나 사회적인 기준에 대한 생각을 한 뼘 접고 지금까지 겪어온 ‘내가 지금까지 아는 나’에 비추어, 어떻게 살아갈지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 하는 결정의 효과와 이득을 측량하지 않고 하고 싶은 일, 필요한 시간, 행복의 감각에 집중했다. 나에게 나다워지는 것은 완벽한 인간이 되는 것이었다. 선택에 거침없고 스스로를 무엇보다 단단하게 믿는 허상의 영웅. 그러나 과거와 현재의 나는 이미 멀어졌고 더 나아진 것도 그 반대도 분명히 있을 테다. 나다운 게 뭔데! 하는 드라마적 대사를 하고 싶은 건 아니고 궁금했다. ‘나다움’이 허상이라면 과연 내가 믿을 수 있는 나의 것이 있을지. 그리고 그 답을 믿을 것도 없다는 것이다. 비관적인 시점의 불신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낙관적으로 미래를 상상하는 의미에서 그렇다.
처음 하던 점 이야기로 돌아가서 점을 지우면 그게 나인 걸까. 아니면 현재의 나에서 바뀌는 것이니 그 이전의 내가 나인 걸까. 같은 사람일지도 어쩜 완전히 다른 사람일지도 모른다. 외면을 떠나 생각이 달라지고 환경이 변화하기도 하며 사람은 매일 달라진다. 어제 좋아한 것을 오늘은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는 매일의 ‘나다움’은 도저히 정의할 수가 없다. 하지만 성장하지 않아도 아주 조금씩 달라지기를 관찰하고 기록하고 또 변화하는 게 인생의 재미 아닐까. 자아의 완성은 없고 그 때문에 ‘나는 어떤 사람이다.’라는 정의 또한 자꾸 당착 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나는 이제 ‘현재의 나’로 살아 간다. 그대로 굳어가기보다는 찌르고 꼬집어보면서 지금을 잘 기록하며 잘 지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