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밖으로 울창한 나무의 잎사귀들이 반짝거리며 흩날린다.
뜨거운 정오의 햇살이 초록으로 빛나는 모습을 안에서 보면 이보다 아름다워 보일 수가 없다. 카페에 앉아 맑게 닦인 통창 밖을 바라보다보면 세상이 이렇게 평화로웠나 하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밀려오곤 한다.
조금 전 카페에 걸어 오기까지의 고난은-땀을 뻘뻘 흘리며 걸어오면서 어째서 난 점점 더위에 약해지는 걸까 생각하다가 사실은 지구가 더워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는-벌써 기억에서 모두 잊힌 듯이 말이다. 아니, 어쩌면 내가 더위에 약해 지지도, 지구가 더워진 것도 아닐지 모르겠다. 그저 내가 매해의 여름을, 그 뜨거웠던 열기를, 착실하고도 정성스럽게 매번 잊고 있었던 것 아닐까. 입추가 지나 선선한 바람이 불어올 때 이미 나는 올해의 열기도 잊어갔던 것 아닐까.
얼마 전 사진첩을 뒤적여보았다. 거의 10년전의 내 모습이 툭 튀어나왔다. 그때의 나는 그대로 나인데, 우린 같은 사람인데, 도저히 그 어색한 간극을 줄일 수가 없었다. 그때의 난 10년 뒤의 내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을까? 어떤 식으로 나를 그렸을까?
기억을 헤집어도 떠오르진 않지만 아마 나였다면 그저 가장 평범한, 열심히 회사에 다니고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하지 않았을까 싶다. 내 부모님이, 내 주변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튀지 않고 무난한 모습으로 말이다. 그래서 서른을 코앞에 둔 지금의 모습과 상상했던 나는 일치할까? 땡, 전혀 틀려버렸다.
대학교를 졸업하면서부터 나의 삶은 하루하루 내가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늘 흘러갔다. 그것이 긍정적이던, 부정적이던 말이다. 졸업과 동시에 브랜드를 꾸리고, 그를 운영하며 고군분투했다. 그러다 전공을 살려보고 싶은 마음에, 직장에 들어갔다. 그러다 잠시간의 직장생활을 뒤로하고 나온 지금의 나는 내년을 목표로 결혼준비 중이다.
글로 적어 놓으니 참 별거 없다 싶으면서도 지나간 시간들을 직접 목도한 나로써는 감회가 남다르기도 하다. 어느 세월에 이 긴 시간들이 다 지나갔을까, 난 참 많은 걸 해낸 동시에 많은 걸 놓쳤겠구나.
요즘의 나는 짧은 인생 중에서 가장 붕 뜬 시기를 보내고 있다. 수능 끝난 고3보다 더 그렇달까. 내년초, 결혼과 함께 지방의 광역시로 먼 길을 떠나야 한다. 평생 수도권 밖으로 벗어나본적 없지만 그리 걱정되진 않는다. 그럼에도 멀리 이동해야한다는 상황은 지금의 나에게 무언가를 새로이 시도하지 못하게 만든다.
모두들 결혼까진 편히 마음먹고 결혼에만 집중하라고, 어차피 이동해야 하니 그때 가서 생각하라고 하지만 무언가 형용할 수 없는 작은 불안들은 내 마음 속에서 떠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나는 또 어떤 새로운 선택을 내려야 할까. 아마 지금의 내가 또 상상하지 못한 선택일 것이다.
삶이 어려운 건 티끌 모아 태산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종종한다. 티끌같이 작고 의미없이 굴러가는 하루하루가 모여 1년, 5년, 10년이라는 시간들을 태산처럼 쌓아 올린다. 월말의 카드 값을 바라보며 내가 쓴 돈이 맞나 의심하듯 흘러버린 시간 속 날들은 정말 내가 살아낸게 맞나 의아할 때가 많다.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나를 예측하지 못했듯, 지금의 나도 이전의 내가 참 희미하다. 티끌들이 모이기 이전의 나와 태산이 된 지금의 나는 같은 사람일까 다른 사람일까?
여전히 카페에 앉아 창 밖을 바라보고 있다. 어느 덧 열기는 거짓말처럼 사그라들고 부드러운 빛이 잔잔히 내려앉는 시간이 되었다.
지금 이 시간도 어느 순간에 다다라서는 거짓말같이 흐릿한 날들이 될 것이다. 그리고는 되돌아가고픈 과거처럼 예쁜 포장지에 잘 싸여 나에게 그리운 향수를 가져다 줄 것이다. 사실은 내가 살아내고 있는 하루들이 미래의 내가 가장 가지고 싶어하는 날들 인줄도 모르고 말이다. 그 뜨거운 여름날의 열기를 또다시 한번 더 잊어버린 채로, 땀을 뻘뻘 흘리며 살아갈테지.
그리고 어느 날 진짜 겨울이 오는 날, 말할 것이다. 그때의 나 참으로 뜨거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