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들어 재밌는 것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재미'라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희미해졌다고 하는 게 좀 더 정확한 표현이겠다. 뮤지컬을 좋아해서 대학에 입학한 이후 지금까지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을 꾸준히 보러 다녔다. 그런데 어언 10여년이 되어서 그런 것일까, 좋아하는 뮤지컬을 기대해서 보러 가더라도 공연을 보는 동안만 잠시 좋을 뿐 그 외 대부분의 시간엔 무감각하고 무감정만이 존재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좋아하고 마음이 설레는 건 어떤 느낌인 건지 감조차 오지 않을 정도로 무뎌지니, 삶에 대한 의욕이 없어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좋아하는 걸 가까이에 하고 즐거워하는 게 삶의 유일하고 강력한 동력이었는데, 익숙함에 권태가 와 버린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그렇다면 삶에 대한 지속되는 권태가 과연 좋아하는 뮤지컬에 익숙해졌기 때문일까? 곰곰이 생각해본 결과 단지 내가 좋아하는 뮤지컬에 권태를 느끼는 것 때문은 아닌 것 같았다. 오히려 뮤지컬을 좋아하는 내 마음은 변함이 없었으나, 그것을 보는 시간 이외에 생활하는 시간에서 극렬한 권태를 느끼고 있었다.
그렇다면 뮤지컬을 관람하는 시간 이외의 시간에는 나는 무얼 하고 있는가? 대부분의 시간 동안 나는 모 대학교에서 행정직 업무를 보고, 주기적으로 글을 쓴다. 그래! 나는 그 두 가지 일에 요즘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행정직 일을 한 지는 벌써 3년 차가 되었다. 철학과 대학원생이던 나를 직장인으로서 자리 잡도록 해주었고 업무의 지평을 넓혀주기도 했던 감사한 일자리인 것은 사실이지만, 정작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아니었다. 나는 무언가 내가 고민한 생각과 가치들이 업무에 반영되는 일을 하고 싶은데, 정작 내가 하고 있는 일은 숫자와 수치를 계산하고 관리하는 일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글을 쓰는 건 나의 인생에서 꽤 많은 시간을 할애했던 분야이기도 하고 내 전공이기도 했다. 제일 중요한 건, 그것이 바로 내가 좋아하는 '활동' 중 하나였다는 것이다. 글을 쓴다는 건 '해야 해서 하는 일'이 아니라 '하고 싶어서 저절로 하는 자발적인 활동' 그 자체였다. 글 쓰는 게 단지 재밌어서 철학과에 입학을 하게 되었고, 그렇게 이때까지 다양한 곳에서 수많은 글을 써왔다.
하지만 너무 많이 글을 써버려서일까? 아니면 이때까지 써낸 글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아부어서 그랬던 것일까? 글을 써서 내놓은 결과물은 점점 내 마음에 차지 않았고, 그러다 보니 글 쓰는 것이 어느새 '자발적인 활동'이 아니라 '일'이 되어버렸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은 내가 원하는 직종의 업무가 아니어서 그럴 수 있다고 이해한다 치더라도, 글을 쓰는 행위는 나에게 행복과 보람을 주는 활동이었는데 이렇게 부담스러워진 이 상황이 참으로 안타깝고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이렇게 고찰해낸 것만으로도 극렬한 정도의 권태감을 느끼는 시기는 지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이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생각을 깨닫게 된 경험은 지극히도 미시적인 경험이었다.
나는 과일 중에 무화과를 가장 좋아하기도 하고, 마침 이렇게 여름과 가을 사이에 있는 이맘때에 나오는 제철 과일이다 보니 요즘 무화과를 자주 사서 먹었었다. 더군다나 무화과는 나에게 사연이 깊은 과일이다 보니, 무화과를 보면 항상 과거의 아련함이 떠오르는 과일이기도 했다.
다시 이야기의 중심으로 돌아가서, 권태감에서 조금 벗어날 수 있었던 계기는 바로 무화과를 씻어서 통으로 먹다가 우연히 과도로 그것을 조각 내 잘라 먹는 순간 느껴졌던 무화과 맛의 차이를 경험하면서였다. 이 글을 읽는 누군가는 그게 도대체 무슨 변화를 주는 경험이냐고 물을 수도 있겠고, 사실 같은 과일을 잘라 먹는다고 해서 객관적으로 맛이 달라질 거라 생각하는 건 나의 착각에 가까울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분명히 그 우연한 차이 속에서 맛의 변화를 경험했다. 정말 지극히 주관적인 경험일 것이다. 하지만 먹기 바빠 통으로 먹던 무화과를 마치 디저트 가게에서 파는 무화과 타르트에 놓인 무화과 조각처럼 베어 먹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조각 내 먹은 순간, 무화과의 은은한 단맛이 더욱 강렬하게 느껴졌다.
나는 단지 과일 한 개를 조각 내 먹었을 뿐인데 이렇게 다른 맛을 느낀 이 경험은 희극과 비극은 종이 한 장 차이일 뿐이라는, 꽤 보편적인 경험을 하도록 만들어 주었다. 사실 철학과를 가게 된 것도 (부끄럽지만) 고등학생 때 사는 게 이미 무의미하게 느껴져서 삶의 의미를 찾고자 입학하게 된 것이 크다.
그렇게 대학교에 입학하여 현실 감각이 생기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나름 고등학생 때 삶에 대한 본질적인 고민을 통찰했기 때문에 더 이상 인생에 대한 고민이 없을 거라고, 지금 생각하면 다소 귀여운 교만을 가지고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인생에 대한 권태는 의도치 않게 자주 찾아왔고, 이번 권태도 나에겐 극복하기 녹록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삶에 대한 강렬한 무의미를 경험하는 것이 꼭 절대적으로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이번 경험을 통해 들게 되었다. 강렬한 무의미를 경험한 뒤, 인생은 그 의미를 재구성하기 나름이라는 말이 있듯이, 인생에서 우연히 다가오는 작은 변화를 오롯이 받아들였을 때 삶의 결이 새롭게 재구성되는 경험을 소위 '무화과 조각 내 맛보기'를 통해 경험하게 된 것이다.
요즘 읽고 있는 책이 있다. 심리 상담과 관련된 책인데, 그곳에서 읽었던 문장이 생각나는 날이다. 즉, 인생을 잘 살아가는 방법은 서퍼 고수의 삶과도 비슷하다는 것이다. 제대로 된 서퍼는 흘러오는 파도의 모양이 이렇고 저렇기를 바라지 않는다. 다만 자기 앞에 흘러오는 우연한 파도에 자기 몸을 맡기고 그 자체를 즐길 뿐이라는 것이다.
나의 고질적인 습관 중 하나가 바로 너무 진지해지는 것인데, 인생에 관성이 느껴질 때마다 우연히 다가오는 작은 변화들에도 귀를 기울여보기로 또 다시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