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속과 숏폼이 오가는 시대에 시를 읽는 건 적합할지도 모른다. 짧고 간단해서 시집 한 권을 다 읽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반대편에선 시가 난해하고 어렵다는 말도 흔하게 들린다. 짧은 만큼 압축되어 있고, 간단하지만 비유적인 표현이 있어 해석하기에 시간이 걸리기에 그렇다. 안도현의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는 시 세계에 발을 들이고자 하는 이들을 위한 책으로, 시가 어떻게 탄생하는지를 촘촘히 분석한다.
안도현 시인을 떠올리면 늘 따라붙는 시가 있다. ‘연탄 시인’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연탄에 관련된 그의 시는 대부분이 아는 대중적인 시로 자리 잡았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 안도현, 「너에게 묻는다」
이 시를 처음 접했을 때 신선한 충격이 기억난다. 단 세 줄로 사람과의 관계와 배려를 성찰하게 만드는 시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렵거나 추상적인 표현 하나 없이 직관적으로 이해가 되는 시를 보며 시인에 대해 생각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재미있는 건, 안도현 시인은 연탄을 소재로 타인에 대한 사랑이나 희생을 쓰려고 했던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단지 ‘가을’을 쓰려고 연탄을 끌어들였을 뿐이라고 밝혔다. 그에게 있어서 연탄이란, 여름의 뜨거운 기운이 꺾일 때쯤 연탄을 실은 트럭이 골목을 누비는 것으로 구체화한다. 연탄이 모습을 드러내는 시기가 바로 가을이라는 것이다. 이때 계절이 흐르며 그가 사는 가파른 언덕이 빙판길로 변했을 때 늘 비탈길에 연탄재를 잘게 부수어 뿌려놓는 이가 있었다. 시인은 그것을 보며 이 세상은 다른 이들을 위해 일찍 일어나 행동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결국, 그에게 연탄은 의도치 않게 가을과 타인과의 관계 성찰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선물했다.
의도한 방향과 의미가 다르게 통했을지라도 타인과 삶을 향한 마음을 따뜻하지만, 상투적이지 않게 전했기에 이 시가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까. 이렇듯 시인은 시를 쓸 때 상투성의 그물에서 벗어나야 함을 강조한다. 만약 그가 가을이라는 소재를 바탕으로 시를 쓴다고 결심하고 상투적인 언어들, 이를테면 낙엽, 단풍, 허수아비, 추석과 같은 말을 생각해냈다면, 그 단어들이 ‘낙엽은 떨어지는 것’, ‘단풍은 빨갛게 물드는 것’, ‘허수아비는 참새를 불러들이는 것’ 등으로 귀결된다면 그 시는 지루함에 갇히게 된다고 일컫는다.
"기계적인 우리들의 삶 속에 파묻혀 있는 세계를 관찰하고 느끼고 그것을 언어로 드러내는 일"이 미적 인식이라면, 시를 쓰는 것은 미적 인식을 최대한 불러오는 것이다. 즉 시는 자신만의 감각으로 언어를 재창조해 살아있는 것으로 불러주어야 한다.
기억은 시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 안도현 시인은 시를 쓰는 행위를 ‘삼겹살을 뒤집는 것’에 비유하며 ‘제발 삼겹살 좀 뒤집어라’라고 표현한다. 삼겹살을 구울 때 고기가 익기만을 기다리는 것보다 타지 않게 뒤집고, 가스레인지의 불꽃을 조절하는 사람은 더 많은 경험으로 인해 더 많은 기억을 소유하게 된다. 세심한 관찰이 더 나은 시를 쓰게 하는 연료가 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소리와 향을 언어로 묘사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묘사는 관찰로부터 시작된다. 밤은 어둡고 여름은 덥고 꽃은 아름답다는 표현이 특정 대상을 면밀히 관찰했다고 여겨지진 않는다. 밤이라는 소재를 내세운다면 밤하늘을 비롯한 밤에 대한 전반적인 것들에 대해 묘사해야 한다. 크레파스를 들고 밤하늘을 표현해보라고 했을 때 단순히 검은색 크레파스로 도화지의 반절을 까맣게 칠하는 것이 대상에 대한 관찰이 되진 않는다. 사진만 찍어봐도 밤하늘의 모습은 매우 다채롭다. 푸르스름한 하늘이 노을이 지며 빨갛게 변하다가 보랏빛으로 물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보랏빛은 다시 진한 푸른 빛으로 변해가지만, 가로등에 비친 하늘은 어스름한 하늘색과 같다. 검은 하늘은 밤이라고 인식되는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나타난다.
저자는 관찰의 목적이 다르다고 시인의 관찰이 과학자의 관찰보다 치밀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관찰을 통해 무언가의 이름을 알게 되고 그것들을 자세히 파헤치다 보면 그 대상을 함부로 대하지 않게 되고, 그 존재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려는 인식이 크게 박힌다. 시를 쓰는 일이란 단순히 길게 늘여진 것을 짧게 표현하는 것을 넘어 세상을 알고 사람과 세계의 존재를 이해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시 쓰기에 임하는 자세는 삶을 대하는 태도와도 연결된다. 스쳐지나듯 관찰하고 대충 끄적이는 것만으로 온전한 시를 완성하기는 쉽지 않다. 진짜 관찰자처럼 섬세하게 관찰하고, 대상에 이입하여 이해하고, 표현을 다듬기 위해 여러 작품을 필사해보는 노력도 들여야 한다. 추상적인 감정을 구체화하는 것에도 다양한 방식이 있다. 쓰고자 하는 손끝의 움직임을 한계짓지 않고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의 대상을 하나의 의미로 단정 짓지 않는 것은 세상을 한 방향으로 바라보지 않겠다는 다짐과도 연결된다.
예술은 불안정함 속에서 흔들리더라도 나아가는 행위와 같다. 다만 그렇게 흔들리는 행위가 부정적으로만 인식되진 않을 것이다. 불안정하고 상처투성이라도 그곳에서 나아가는 힘이 우리의 모습을 만들어갈 것이기에. 그런 흔들리는 기쁨을 소설가 박범신은 이렇게 표현했다.
“문학, 목매달아 죽어도 좋을 나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