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응, 잘들 가라.
오냐. 그래 그래. 조심해서 가라.
늙어서 노망이 났는지 오매불망 명절만 기다렸다. 며칠 내내 밥이 밥인지 국이 국인지 모르고 그래도 끼니마다 챙겨 먹었다. 아무리 입맛이 없어도 뭐라도 먹어야 기운을 차릴 거 아니냐. 기운을 차려야 니들 얼굴을 다시 볼 거 아니냐. 니들 왔을 때 내가 까무러져 있으면 너희들이 또 속상하다. 그래서 밥을 먹었다. 문밖까지 마중은 못 나가도 문지방 넘어 들어온 너희를 맞아줘야 하니까, 다리에 힘을 주고 벌떡 서서 반겨줘야 하니까, 찬밥을 물에 말아서라도 몇 숟갈씩 떠먹었다.
영감이 은행 가 뽑아온 빳빳한 돈을 세고 또 센다. 하나, 둘, 서이, 너이. 큰 손주랑 둘째는 두 장씩. 그 밑에 애들은 한 장씩. 혹 잘못 넣었을까 봉투마다 다시 빼서 돈을 센다. 하나, 둘, 서이, 너이. 아무리 세어봐도 돈이 늘어날 일 없고, 어째 세어볼 때마다 한 장씩 두 장씩 줄어드는 것만 같아 불안한 맘뿐이다. 평생을 그렇게 맘 졸이며 살았다. 줘야할 것이 줄어서, 나눠줄 것이 없어서, 내 마음 그리 까맣게 타서 영영 쪼그라들었다.
이백 살까지 살 거라던 영감은 새해가 왔다고 더 팔팔하다. 날 풀리면 마실을 나가고, 동네 영감들이랑 뜨끈하게 점심도 자신다. 새해인데 방에 누워만 있지 말라고, 기운 내서 움직여보라고 영감이 구박을 준다. 영감은 괜찮은데 나만 늙은 게 퍽 억울하다. 언젠가부터 해가 바뀌는 게 무서웠다. 하루가 다르게 말을 안 듣는 몸이, 자꾸만 땅을 향해 고꾸라져가는 몸뚱어리가 무서웠다. 시간은 갈수록 사나워지고, 서글퍼지고, 무의미해진다. 숫자와 시간으로서 새해는 내게 희망도 뭣도 이제는 아닌 것이다.
그래도 때마다 약을 꺼내 먹는다. 아침저녁으로 영감이 챙겨주는 혈압약과 당뇨약을 거르지 않고, 가슴이 답답할 땐 소화제와 진통제를 섞어 먹는다. 살기 위해서 약을 먹고, 약을 먹어서 시간을 겨우 이겨낸다. 그렇게 버텨서 이번에도 새해를 맞는다. 포르르 달려온 나의 새해들이, 진짜 나의 소망 같은 것들이 텅 빈 이 집에서 한소끔 북적이길 나는 기다린다.
그렇게 또 새해가 온다. 푸릇한 비릿한 새해들이 곁으로 몰려든다. 저들끼리 떠드는 말들, 의미를 모르겠는 웃음, 귀가 먹어 모든 소리가 소음이 되었더라도 나는 괜찮다. 나를 두고 내가 모르는 말들로 함께 웃는 너희 얼굴을 보는 걸로도 나는 좋다. 내 손을 다정히 잡고 말을 건네는 너희에게 나는 빙그레 웃음을 지어 보인다. 그래, 뭐라고? 아무렴 무슨 말이라도 좋다. 너희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가슴을 파내어 그 얼굴 하나하나 다시 새긴다. 이미 너희들을 새겼던 쓰라린 자국 위로 매년 너희의 얼굴을 덧그린다. 어느새 너희들 머리도 희끗해졌구나. 환히 웃는 모습이 그래도 건강해 보인다. 새해에 내 복은 그거면 됐다. 정말로 그거면 됐다.
온 가족이 둘러앉아 밥을 다 먹고서 서둘러 상을 치운다. 누군 화장을 하고, 누군 옷을 입고, 주방에선 지들끼리 음식을 나누고 짐을 챙긴다. 그렇게 하나둘 떠나갈 준비를 한다. 벌써 며칠이 지난 건지, 하룻밤 겨우 보낸 건지 이틀은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이번 명절엔 왜 그렇게 빨리 가냐. 뭐가 그렇게 바쁘냐. 조금 더 있을 순 없는 거냐. 타박하고 싶은 마음을 참아본다. 내일 가는 건 안 되지? 그렇지? 지금 가야겠지? 간절한 물음을 우물우물 삼켜본다.
너희는 가고 나는 이곳에 있다. 영감이랑 또다시 둘이서 있다. 그러니 조심해서 가라, 나의 새해들아. 내 걱정 말고 훌쩍 떠나가라. 내가 몸이 아파 멀리까지 배웅은 못 나간다. 운전은 천천히 하고 도착하면 전화해라. 꼭 전화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