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새해를 맞이하면 ‘지난해와는 달라진 나’를 그리기 마련이다. 그 방식은 각양각색이다. 추상적인 방식으로 꿈에 그리던 목표를 상상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제법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는 이들도 있다. 가령 큰맘먹고 헬스장 회원권을 끊는다든가, 1주일에 한 권씩 책을 읽는다든가, 미라클 모닝으로 아침형 생활습관을 만든다든가 말이다. 누군가는 이를 꾸준히 실천하며 꿈에 그리던 환골탈태를 이루는 반면, 근사한 계획과 그렇지 못한 행동으로 작심삼일에 그치는 이들도 있다. 안타깝게도 나는 후자였다.
그런 나에게도 지난해 딱 하나, 나름 ‘성공의 축’에 속하는 새해 다짐이 있었다. 바로 새해에 장만한 다이어리를 연말까지 사용하는 것이다. 오랜 기간 일기를 써 왔던 이들에게는 별것도 아닌 일일 것이다. 그렇지만 언제나 새해의 다짐이 장렬히 흐지부지 되었던 나에게 이것은 약 3년간의 시행착오를 거친 성취였다.
첫 다이어리는 2023년, 학부를 졸업하고 반강제로 무궁무진한 선택지가 펼쳐진 나에게 최소한의 방향성을 잡아 주기 위해 선물을 마련했다. 그러나 약 6월쯤, 예상보다 석사 과정을 일찍 시작하며 정신없이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는 데에 몰두한 나머지 다이어리의 존재는 내 머리 속에서 먼지처럼 사라졌다 (그래도 다시 들춰보니 9월까지는 나름 일정이 적혀있었다). 그리고 수업 학기가 끝나기 무섭게 논문을 준비하며 2024년의 다이어리는 구입조차 하지 않았다. 아니, 구입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내가 다이어리라는 것을 써 보기로 다짐했다는 사실 자체를 잊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한 듯하다.
시간이 지나 2025년, 나에게는 다시 무궁무진한 선택지가 주어졌다. 조금 모순적이지만 폭주기관차처럼 달려야 할 길이 없어지니 문득 다이어리 생각이 났다. 마침 산책도 할 겸 집 근처에 있는 대형 서점의 문구 코너에서 적당히 손에 잡히는 깔끔한 디자인의 다이어리를 하나 골랐다. 딱히 누군가가 볼 일은 없을 테지만 첫 장을 펼쳐 나의 이름과 연락처를 적었다. 그리고 1월 달력이 있는 페이지를 펼쳐 다이어리를 구입한 날짜를 표시했다. 잠시 멈췄던 나의 다짐이 다시 움직인 순간이었다.
비장하게 나의 다짐이 시작되었다고 했지만 나의 다이어리는 굉장히 얼렁뚱땅 채워져 갔다. 글씨체도 자유분방하다. 나라는 인간은 처음부터 장문의 글을 쓰면 곧바로 지쳐 버릴 것을 알기에 휴대폰 갤러리와 메일함을 뒤적거리며 과거의 일정이나 추억들을 간략하게 남겼다. 그 다음에는 지원서 작성, 나들이, 부모님과의 영상통화 등 앞으로 다가올 크고 작은 일들을 써넣었다. 분량은 정말 쓰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2~4문장 정도. 때로는 2주치 일기를 몰아서 쓰기도 했고, 단지 다이어리를 채운다는 목적으로 이미 지나버린 일정을 표시해 두기도 했다. 뭐라도 남겨두면 알차게 사는 기분이 들었다.
다이어리 쓰기의 지속 가능성에 가장 큰 기여를 했던 것은 다름 아닌 미술관 전시장 지킴이 봉사였는데, 지역 주민들이 주로 방문하는 작은 공간이라 전시장에 사람이 없을 때 독서나 글쓰기가 가능했다. 이때 다이어리에 밀린 내용을 채우거나 독특한 방문객들, 그날 만난 다른 봉사자들의 이야기를 기록하다 보면 시간이 순식간에 흘러갔다. 봉사를 하지 않는 날에도 날씨가 좋아 공원이나 카페로 나갈 때는 다이어리를 챙겼다. 분위기 좋은 공간이나 따스한 햇살 아래에서 글을 쓰면 제법 운치가 있다. 가볍게 2문장만 쓰자는 마음으로 페이지를 넘기면 가끔은 진심 어린 장문의 글쓰기가 될 때도 있었다.
다이어리 쓰기의 또 다른 묘미는 ‘숙성’이었다. 9월쯤 이었을까. 봉사를 하러 갔던 미술관에 펜을 챙기지 않고 다이어리만 덜렁 가져온 날이 있었다. 차라리 방문객이라도 많았다면 좋았을 텐데. 그날따라 미술관은 너무나도 한적했다. 아쉬운 대로 지금까지 썼던 다이어리를 책 대신 읽기 시작했다. 의외로 재미있었다. 나는 3월에 벚꽃과 새로운 인연들에게서 설레었던 사람이었고, 가장 뜨겁고 낮이 길었던 6월 말에 방황과 좌절을 겪던 사람이었다. 서로가 다른 시간에 있었기 때문일까. 글쓴이와 읽는이는 같았음에도 축적된 시간이 지난 날 울고 웃었던 나를 위로하고 공감해 주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 12월. 다이어리의 마지막 달력에서 12월 25일을 찾아 ‘메리 크리스마스’를 적으며 내가 한 권을 끝까지 썼다는 것을 실감했다. 처음으로, 끝까지 쓴 다이어리가 생겼다. 예상보다는 무덤덤했다. 그 순간에는 내가 끝까지 썼다는 것보다 다음 1월을 기록하는 칸이 없다는 것이 더 실감이 나지 않았다.
2026년 새해에 한국에 들러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다 보니 새 다이어리를 구입하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문득 돌아보니 3월, 다이어리를 구입하기에는 조금 늦은 시기지만 지난 새해에 느꼈던 감정들을 어딘가에 남기고 싶었다. 게다가 2026년은 앞으로 9달 반이나 남았다. 기록을 남기기엔 넉넉한 기간이다. 급하게 아마존에서 마음에 드는 색을 골라 주문했다. 속지 디자인이 아쉬웠지만 나름 괜찮은 선택인 것 같았다.
나의 다이어리 쓰기에는 규칙성은 없었지만 꾸준함은 있었다. 규칙 없는 꾸준함. 이것이 어쩌면 나만의 지속 가능성을 유지하는 원동력인 것 같다. 꾸준함을 유지하고 싶은 일이 하나 더 있다. 조금 뻔하지만 에디터 활동이다. 지난 1월과 2월, 잠깐의 휴식기를 가졌지만 당장은 이 활동을 ‘어쩌다 보니 안 하게 된 것’으로 마무리하고 싶지는 않다. 어느덧 글을 쓴 지 1년이 되어 간다. 오는 3월부터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나만의 렌즈로 바라보는 활동을 다시 이어가고자 한다. 다이어리 쓰기보다는 조금 더 규칙적이어야겠지만, 나만의 꾸준함을 유지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