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바리스타 자격증 학원에 찾아갔다. 카페를 차린다거나 전문가 수준의 바리스타가 되겠다는 거창한 계획은 전혀 없었다. 그저 내가 좋아하는 커피를 더 잘 이해하고 싶었다.
나는 커피를 매우 좋아한다. 탄산음료도, 술도, 액상과당도 끊어야 한다면 끊을 수 있지만 커피가 없는 삶은 상상하고 싶지 않다. 커피를 마셔도 전혀 잠이 깨지 않는 카페인에 둔감한 체질인지라 아무래도 카페인 약물의 효과보다는 순전히 그 맛과 향에 중독된 것 같다.
본격적으로 커피에 중독된 것은 대학생 때부터였다. 1교시 전 아침과 점심시간에는 정기적인 의식처럼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사 가는 수많은 학생들을 볼 수 있었다. 특히 한겨울에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사 먹는 ‘얼죽아’ 클럽의 세력이 매우 강했다. 나 또한 ‘얼죽아’ 클럽의 멤버로서 사시사철 학교 앞 저가 카페의 800원짜리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달고 살았었다. 이제는 고작 몇 년 더 나이를 먹었다고 따뜻한 커피가 좋지만 말이다.
성공적으로 커피에 중독되었으니 다음은 맛과 향을 따질 차례다. 가족들 모두 커피를 사랑하는 탓에 집에는 늘 핸드 드립 도구들과 모카 포트, 원두가 구비되어 있었다. 덕분에 더 깊은 커피의 세계로 쉽게 빠질 수 있었고, 맛있기로 유명한 카페들의 원두를 사서 커피를 직접 내려보며 내가 어떤 커피를 좋아하는지 취향을 찾아나갔다. 그럴수록 커피에 대하여 더 많은 것이 알고 싶어졌다. 왜 드리퍼의 모양이 다르게 생긴 것인지, 원두의 향미는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인지, 커피의 맛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에는 무엇이 있는지 궁금했다.
직접 학원에 가보니 바리스타 자격증은 기초 단계를 지난 뒤 커피 추출, 테이스팅, 로스팅 등의 세부 분야로 깊어지는 구조였다. 아쉽게도 여러 가지 현실적인 한계로 기초 단계의 자격증만 취득했지만, 이 짧은 교육 이후로 커피에 대한 나의 이해는 이전보다 확실히 선명해졌다. 내가 좋아하는 강한 산미의 커피를 추출하려면 원두를 굵게 분쇄하거나 추출을 짧게 해서 추출 초반부에 나오는 가벼운 아로마의 비중을 높이면 된다는 것, 내추럴보다 워시드 가공법으로 가공한 원두가 상대적으로 밝고 깨끗한 산미가 난다는 것은 교육을 통하여 새로 알게 된 지식이었다.
가장 재미있게 들었던 수업은 커피의 향미 표현 수업이었다. 여러 가지 원두를 쓰는 카페에 가면 각 원두의 향미에 대한 설명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허브, 시트러스류, 베리류 등으로 표현하는 산미와 초콜릿, 견과류, 캐러멜 등으로 표현하는 고소한 쓴맛에 대한 설명이 대표적이다. 향미 표현 수업에서는 이 음식들을 직접 맛본 뒤 어떤 맛인지 묘사하며 원두의 테이스팅 노트를 표현하는 방식을 배웠다. 예를 들어 톡 쏘는 신맛인 시트러스의 산미와 단맛이 가미된 신맛인 베리의 산미는 분명히 다르다. 그러니 비슷한 산미 분류의 커피라도 테이스팅 노트가 레몬인 원두와 라즈베리인 원두는 향미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맛을 구분하는 방법을 안다면 스스로의 취향을 더욱 높은 해상도로 표현할 수 있다. 나는 이제 내가 베리류 산미의 커피를 좋아한다는 것을 안다. 덕분에 처음 보는 원두를 구매할 때도 취향에 맞는 원두를 잘 고를 수 있게 되었다.
무언가를 배우는 것은 참 즐거운 일이다. 그것이 무용할수록 더더욱 말이다. 만약 내가 카페에서 일을 하겠다는 목표로 커피를 배웠다면 지금처럼 즐겁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업으로 삼고자 한다면 반드시 잘 해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종종 쓸모가 없어 보이는 배움으로 도피하고는 했다. 커리어를 위해 필수적인 영어를 공부해야 할 시간에 다른 언어를 배우거나, 업무에 대해 공부하거나 차라리 집에서 푹 쉬어야 할 시간에 커피를 배우러 다니는 것은 누군가가 보기에 시간 낭비일지도 모른다. 사실은 나도 알고 있다.
그렇지만 모든 일을 효용의 관점에서만 쓸모를 따지는 것은 너무 건조하지 않을까? 나는 우리가 조금 더 낭만을 추구하며 살아도 좋을 것 같다. 비록 성과나 커리어에 직접적인 도움이 되지는 않더라도, 이 시간들이 우리의 삶을 더 풍요롭게 채워줄 것이라는 사실만큼은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