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앙타이 Harpsichord를 보고 난 뒤의 생각
지난 20일. 나는 하프시코드 소리를 직접 듣는다는 것에 기대에 부풀어 있었지만, 사실 2부가 시작되기 전까지 하프시코드에 대한 매력을 크게 느끼지 못했다. 피에르 앙타이가 들어와 처음 하프시코드의 선율을 들려줄 땐 ‘이런 느낌이구나’ 알았을 뿐, 그 이후부터는 땡강땡강 쳐지는 소리만 기계적으로 들릴 뿐이었다.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
Georg Friedrich Handel
오페라 '충직한 양치기' 중 서곡 d단조, HWV8a
Overture in d minor
from opera 'Il Pastor Fido', HWV8a
그렇게 1부가 끝나고, 짧은 INTERMISSION 후 2부가 시작됐다.
다시 하프시코드 소리를 들었을 때, 난 그 자리에서 용수철처럼 뛰어오르고 싶었다. 비로소 이 자리에 온 것에 감사함을 느꼈다. 정말 너무도 좋았기 때문이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 그런데 가슴속으로 궁금하고 느껴보고 싶기도 했던 그 질문의 답을 찾은 기분이었다. 바로 이번 공연에서 말이다. 그것도 1부가 끝나고 2부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클래식을 듣는 이유”. 누군가가 나를 위해 연주를 해주는 느낌이었다. 나만을 위해. 근데 그 나만을 위한 연주가 단순히 기계적으로 연주를 해주는 것이 아닌, 나를 들어 올려 마음을 녹여주고 어루만져주는 느낌. 내 존재 자체를 사랑해줘서 위로받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너무 좋았고 너무 행복했다.
그래서 이런 느낌을 또 받고 싶어서 사람들이 피아노 연주를 들으러 갈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신기하게도 나의 이런 느낌을 함께 공연을 보러 간 친구도 느꼈다. 그 친구의 단어로 말해보자면,
“내 시간에 이 사람이 놀러와 준 느낌이었어.”
나보다 매우 시적이지 않나. 우리는 같은 걸 같은 공간에서 느낀 모양이었다. 그 친구 또한 너무도 만족스럽게 보고 온 것 같아 내가 다 뿌듯해졌었다. 정말 그 당시의 기분은 소름이 돋는다는 표현이 적합할 것 같다. 끝나고의 흥분되는 기분을 놓치기 싫을 정도였다. 하프시코드는 왕에게도 연주되었다고 하는데 그 왕도 이런 음색 때문에 좋았을까 싶었다. 몸체에서 나와 방으로 울려 퍼지는 청아한 듯 쨍한 소리.
건반을 위한 모음곡 제2권 제4번 d단조, HWV437
Suite for keyboard Vol.2, No.4
in d minor, HWV437
‘도르르 도르르’ ‘띠링 띠링’
그제야 귀가 뚫렸는지 피에르 앙타이의 적절한 곡 선택 때문이었는지, 다음으로 이어진 헨델의 건반을 위한 모음곡 제2권 제4번 d단조, HWV437 (Suite for keyboard Vol.2, No.4 in d minor, HWV437)도 물 흐르듯 나에게 스며들었다.
기계처럼 쳐지는 것 같던 건반의 소리도 유리알 굴러가듯 들렸다. 통통 튀며 변하는 음들의 소리도. 그 소리들이 겹쳐 올려지는 소리도. 중간중간 아예 다른 튀는 음이 섞여 나오는 것도 묘했다. 그 맑은소리를 한 번 더 듣기 위해 자연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집에 와 2부가 시작되자마자 들었던 오페라 '충직한 양치기' 중 서곡 d단조, HWV8a (Overture in d minor from opera 'Il Pastor Fido', HWV8a)를 리뷰 쓸 때 첨부하려 영상을 찾았다. 그런데 분명 PREVIEW를 쓸 때 들었던 소리 같았는데 아무리 뒤져도 나오지 않았다. 하프시코드뿐 아니라 피아노로도 연주된 것이 없고 오페라 합주로만 남아있어 혼자서 다시 듣지 못하고, 첨부할 수도 없다는 상실감에 빠졌었다.
그래서 찾는 걸 포기한 후 공연 기획 노트에 있는 피에르 앙타이의 연주 영상을 눌렀을 때 어처구니없게도 내가 찾던 곡이 거기 있었다. 나도 PREVIEW에 올렸던 영상에, 그것도 첫 번째에 들어있던 곡이었다. 웃기게도 내가 피에르 앙타이 연주를 들어 보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을 때 들었던 곡도, 들으러 갔을 때 소름이 끼쳐 나온 곡도 바로 이 곡이었던 것이다.
하프시코드 소리는 음원과 영상에서 더 쨍하게 들리지만, 그 느낌과 분위기는 현장에서 들을 때 압도당하는 느낌이었다. 공간을 휘저으며 나에게 꽂혀 들어와 나만의 공간에 그가 들어온 느낌이었다. 사실 PREVIEW를 작성하며 기대했던 건 바흐의 곡이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헨델의 곡에 펀치를 맞고 왔다.
정말 소름이 돋을 정도로 헨델의 곡이 좋았다. 바흐의 곡이 기법적으로 뛰어났다면 헨델의 곡은 더 감성적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나의 착각일 수도 있지만 그 또한 이 곡을 치면서 온 마음으로 느낀 것 같다. 선율에 맞춰 표정을 짓고 몸을 기울이며 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피에르 앙타이는 친절한 사람이었다. 연주 시작 전, 연주가 끝난 뒤 관객들을 향해 연주할 곡에 대한 설명을 덧붙이는 걸 잊지 않았다. 사실 긴 영어에 모두 해석하지 못했지만 이날 그의 재량으로 연주할 곡들의 순서가 많이 변경되었다. 원래 2부에서 바흐의 곡 후 헨델의 곡을 연주한다 쓰여 있던 프로그램과 달리 2부에서 바로 헨델의 곡을 연주했으니. 그 때문에 듣는 나의 입장에서는 시너지 효과가 더 컸던 것 같다. 뭔가 밤하늘 폭죽이 더 크게 더 크게 수놓아지듯 펑펑 터지는 느낌이었다.
그가 쳐준 앙코르곡 중 가장 마음에 와닿았던 한 곡을 소개하고자 한다.
라모의 곡으로, 낭만적이고 아름다웠다. 바흐와 헨델과는 또 다른 부드러움을 가진 곡이었다. 그래서 첫 음을 듣자마자 마음속으로 ‘오옷!’을 외쳤다. 조금 방정맞지만 정말 말 그대로 ‘오옷!’이라는 감탄사가 침과 함께 넘어갔다. 앙코르곡까지 듣고 나간 밖에서도 그 소리가 가장 인상 깊이 남았다.
그리고선 밖을 나가 맞는 밤공기가 정말 시원했다.
그의 연주 덕분인지 마음이 한없이 들떴었다. 우리는 서늘한 바람과 사람들 사이사이를 뛸 듯이 걸어 지나치며 신나게 떠들었다. 서로의 연주 감상을 나누며 우리는 그 시간, 그 공간에서 같은 것을 느꼈다는 것에 진심으로 기뻐했던 것 같다. 지금도 생생하다. 늘 놀러 가면 지나치던 종로의 거리도 뭐가 그렇게 예뻤는지 둘이 호들갑 떨어대며 사진을 찍었다.
이런 게 사람들이 피아노 연주를 듣는 이유일까. 각기 다 다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이번에 내 나름대로 ‘내가 클래식을 듣는 이유’를 느꼈다.
나의 양분이 되고, 찬란한 추억이 될 소리. 무엇보다 평소엔 잘 느낄 수 없는 나를 전율로 휘감는 환상의 소리를 듣고 싶은 마음이 아닐까 하고. 사실 환상의 소리라는 단어는 마음에 잘 와닿지 않았던 것인데, 그 ‘소리’라는 단어가 악기에서만이 주는 전율과 힘에 걸맞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글 - 아트인사이트 에디터 김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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