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문서 도대체 어른 맞아요?
우리는 살면서 모두 어른이 되지만, 똑같은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다. 도감에서 '나비'가 날개의 무늬와 색깔에 따라 이름을 달리하는 것처럼 말이다.
살면서도 다양한 어른을 만난다. 그건 이름 그대로 어른스러워 본받고 싶은 사람일 수도. 말로만 나이를 먹은 사람일 수도, 어리지만 생각이 깊어 나보다 어른 같은 사람일 수도 있겠다.
도대체 어른 맞아요?
<어른도감>에서는 이런 여러 어른을 그린다.
영화는 아버지가 죽고 난 뒤 혼자 남은 경언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엄마는 예전에 집을 나간 것 같다. 경언은 까칠하고 시크해보이지만 혼자 남겨진 집에서 운다. 참을 인(忍)을 세 번 손바닥에 그려 삼켜 먹으며 울음을 삼키는 아이다. 너무 일찍, 너무 많이 그 나이에 알지 않아도 될 일들을 겪어 경언이는 철이 빨리든 애어른이 되었다. 그런 경언에게 삼촌이라 하는 사람이 아버지 임종 때 찾아온다. 충분히 수상하고 낯선데 자꾸 달라붙어 아버지의 조의금이나 보험금 얘기를 꺼내는 못 미더운 사람이었다. 그런 삼촌인 재민이 후견인이 되어 둘은 가족이 된다.
재민의 직업은 일명 제비다. 싱글이나 돌싱, 유부녀에게 접근해 꼬신 뒤 등쳐먹는 삶을 살고 있다. 한마디로 말만 나이 먹은, 하는 행동이 철이 덜 든 것 같은 어른이 바로 재민이다. 설상가상 후견인으로서 받은 보험금도 홀랑 모두 잃는다. 재민은 잃은 보험금을 채울 방법으로 작전을 짜고, 경언은 보험금을 돌려받기 위해 얼결에 사기극에 동참하게 된다.
목표는 약사 돌싱 점희. 그런데 이 여자 변수였다. 얼음장 같고 말하는 것도 은근 재수 없는데 알고 보면 상처를 내면에 지닌 따뜻한 여자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경원을 위해주었다. 그래서 뒤통수치려는 재민을 돕는 경언의 마음을 자꾸만 무겁게 했다.
누군가에게 시간을 들인다는 건,
다신 돌려받지 못할 삶의 일부를 주는 거야.
영화 중반, 점점 부푸는 거짓말에 찜찜해 하는 경언에게 재민이 말한다.
누군가에게 시간을 들인다는 건,
다신 돌려받지 못할 삶의 일부를 주는 거야.
목적이 뭐든 간에
하지만 약사 점희는 결국 이 사기극을 알게 된다. 그리고 재민을 불러 돈을 던지고 관계를 끝낸다. 재민은 집으로 돌아와 경언과 말다툼을 한 뒤 집을 떠난다.
그리고 경언은 생판 남이나 다름없던, 이상하고 수상했던 삼촌 재민의 빈자리를 느낀다. 언젠가부터 자신의 외로움을 알아봐 주고, 함께 있어 주고, 웃겨준 무척이나 어른스럽지 않은 그 어른을. 생각해보면 언제부터인지도 모르게 그런 어른에게 빈자리를 내어주고 위로를 받았던 것 같다. 혼자 참으며 애써 어른스러운 척을 하지만 속은 곪아 있었을 경언에게, 참지 말라고 하던 삼촌, 춥다고 하자 곧장 산을 내려가 담요와 핫팩을 가지고 달려오던 바보 같지만 따뜻함을 가진 어른에게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시간을 내어주고, 삶의 일부를 주었을 것이다.
재민 또한 경언과 점희 사건 후 오이도로 내려갔다. 제비 일은 관뒀는지 꽃게 집에서 주차요원 일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손바닥에 참을 인(忍)을 세 번 쓰고 삼킨다. 경언이한텐 참으면 암 생긴다며 하지 말라 했던 것을 재민이 하고 있었다. 늘 도망가고, 사기를 치며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지 않는 삶을 살아온 재민은 어딘가 달라져 있었다. 삶을 참아내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시간을 들인다는 건, 다신 돌려받지 못할 삶의 일부를 주는 거야. 목적이 뭐든 간에”
사실 난 이 대사 하나 때문에 <어른도감>이라는 영화를 보게 됐다. 저 대사를 읽는 순간 큰 울림이 왔다. 공감이 갔다. 그리고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인간관계와 사랑이 떠올랐다. 나는 그것을 함으로써 그 이전까지 몰랐던 감정을 배우고 나의 새로운 부분을 알아갔다. 내 삶의 일부를 그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처럼, 나도 그 사람의 일부를 자연 받게 된다. 좋은 깨달음이든 나쁜 깨달음이든 그게 무엇이든 그 이후에의 난 어딘가 달라져 있었다. 더 나은 아이가 되려 했던 것 같다.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건 놀랍고 아름다운 것이겠지 생각한다. 그래서 저 말이 참 마음에 들었다. 사람은 사람을 통해 성장한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재민과 경언도 서로가 서로의 결함을 채워주며 성장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이 대사의 뒷말은 없었지만, 나에겐 이렇게 들렸다.
'그러니 후회할 것 없다. 그 후의 결말에 대해.' 누군가에게, 무언가에 시간을 들이는 건 오롯이 나의 선택일 테니. 내가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나는 이것을 가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시간을 들여 나의 삶의 일부일 것을 건네주는 것이라고. 내가 들이고 싶어 들인 시간이었을 테니까. 다만 한 가지, 그것에 대한 책임 또한 내가 져야 할 몫이라는 걸 깨닫는다.
아마 이 대사는 내가 사는 동안 한쪽에 묻고 있을 것 같다. 가끔 힘이 들고, 불안해 후회하고 싶을 때 꺼내 보려고. 나의 선택들이었으니까.
다시 돌아가 이야기의 결말을 말하자면, 경언은 재민이 있는 오이도로 찾아간다. 그리고 재민은 경언을 엄마에게 데려다주지만 경언은 재민에게 다시 돌아온다. 엄마의 주소가 아닌 것 같다는, 보험금은 언제 갚을 거냐는 시시껄렁한 질문을 하며 말이다. 그걸 보며 알 수 있었다. 이게 경언의 선택일 것이라고. 삼촌의 곁에 남기로 한 것이라고. 이 둘은 분명 서로를 변화시켰고 서로에게 삶의 일부를 조금이 아니라 많이 주었을 것 같은 생각을 했다.
그렇게 둘은 함께 주유소를 찾으러 걸어가는 것으로 끝이 난다.
<어른도감>을 보고 친구에게 물었다.
어른은 뭘까.
친구는 말했다.
어른은 책임을 지는 일들이 많아지는 것이지 않겠냐고.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지는 것. 어린 날엔 책임을 져주던 것들을 자신에게 옮겨와 이고 가야 하는 것들이 생기는 것. 그것은 사람일 수 있고, 물건일 수 있고, 보이지 않는 것일 수도 있겠지.
예전엔 어른이란 참 멋있어 보이고 뭐든 할 수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래서 난 얼른 어른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살면서 보고 느끼는 어른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을 때론 참아야 하고, 삭히는 일에 익숙해져야 하는 게 늘어나는 것이지 않나 싶다.
또 한편으론 생각한다. 성숙한 어른 어른다운 어른도 하나의 환상이지 않을까 하고. 다만 성장하는 어른이 있을 뿐이지 않을까 하고.
어른도 어리숙하고 부족하다. 태어날 때부터 “나는 어른!”을 이마에 붙이고 태어나는 사람은 없지 않나. 모두가 조그마한 아기였고, 사춘기 소년 소녀였다. 20살이라고 19살과 다르지 않은데 앞자리가 바뀌며 갑자기 책임감이라는 단어를 안아야 했던 그때부터 어른도 사실 별다를 것이 없을지 모른다. 나이를 먹으며 자동 획득되는 단어.
그런 어른이 성장할 때가 있다면, 사람과 관계를 맺고 경험할 때일 것이다. 그러니 살아있는 동안 어른은 성장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성장을 이어나가 그렇게 어른도 더 나은 어른이 되어가는 거라 믿는다. <어른도감>의 삼촌 재민처럼.
이 영화는 나의 기억으로 <너의 결혼식>과 개봉일이 비슷했던 것 같다. 박보영과 김영광이라는 설레는 라인업에 이 독립영화는 살짝 묻혔었지만, 독립영화계에선 신선한 호평의 바람이 불었었다. 1억 원 남짓의 초저예산에도 불구하고 큰 인정을 인정받았다.
지금도 상영 중이긴 하나 큰 상영관에선 더 이상 올리지 않는 것 같다. 서울의 몇몇 독립영화관에서 올리는데 그것마저도 많으면 3번, 아주 이른 아침이나 아주 늦은 밤이라 시간선택이 어려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많은 사람이 잊어버리기엔 아까운 영화라 가지고 온다. 내가 이런 부류의 영화를 좋아해서이기도 하고. ‘어른도감’은 볼 때도 보고 난 뒤에도 따스함이 묻어나왔다. 잔잔하지만 코믹하고 코믹하지만, 눈물 찔끔 나오는 영화였다.
너무 빨리 어른이 돼버린 소녀와 덜 자란 아이인 채로 남아있는 삼촌이 만났을 때의 서로에 대한 위로와 성장이 부담스럽게 다가오지 않는 영화였다.
글 - 아트인사이트 에디터 김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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