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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인사이트 May 07. 2018

고도를 기다리며 - 인간다운 삶에 대하여

마비된 자에게 고통은 없다






고도는 누구인가



 < 고도를 기다리며 >를 한 번도 보지 않은 사람조차 고도가 이 극에서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 정도는 안다. 그리고 이 극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도에 대해 나름의 정의를 내렸을 거라 생각한다. 가장 쉬운 대답은 고도가 '죽음' 내지는 죽음의 사자라는 것이다. 죽음을 기다리는 것. 그것을 기다리다가 나이가 들었나? 가능한 이야기다.


 다른 해석은 고도가 그저 그들과 만나기로 약속된 인물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무료함을 달래줄 어떤 기대되는 일정이 있을 때, 다른 것은 제쳐두고 그것만 기다리게 된다. 그리고 그 일정이 생기는 순간 우리의 시간은 더뎌진다. 고도와의 만남이 그들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들은 오직 그것만 기다린다. 고도가 누구인지조차 잊어버렸지만.


 조금 더 무리한 해석을 해보자면, 어쩌면 고도는 고도가 아닐 수도 있다. 평생 계속해서 반복되는 비슷한 약속일지도 모른다. 그것들을 통칭하여 '고도'라고 부르는 건 아닐까. 고고와 디디는 어려서부터 늘 함께였으니 만나기로 약속한 사람, 그를 기다리면서 벌어지는 일들, 그 사람의 소식을 전하러 온 소년 등 모두가 매번 다르지만 똑같은 사람으로 인식하는 것일 수도 있다.  단지 그들이 어느 순간부터 만나기로 약속된 사람을 '고도'라는 이름으로 통칭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때문에 고도가 누구인지, 그리고 고도와 무엇을 할 것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다만 고도를 기다린다는 목표가 있기에 그들은 오늘도 앙상한 나무 아래서 하루를 견딜 수 있게 되었다.




철학이 왜 생겼는가?



 어쨌든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 그러니까 고고와 디디는 고도를 기다리며 시간을 보낸다. 그들은 그 시간의 적막을 달래기 위해서 끊임없이 대화거리를 만든다. 구두와 씨름하고, 작은 소리에 집중하기도 하고, 서로 역할 놀이를 하기도 하며, 서로의 우정을 의심하기도 한다. 인생에 대한 고찰, 사소한 것들에 대한 의미 부여. 모두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이다. 그 쓸쓸함과 외로움, 지루함,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이다.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의지. 명분과 체면



 디디는 어느 정도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의지를 갖고서 매 순간 현재의 상황을 의식하고자 하는 인물이다. 그런 디디는 초반에 포조의 노예인 럭키의 수난에 대해 연민하며, 어떻게 같은 인간에게 그렇게 대할 수가 있냐며 포조에게 화를 내기도 한다. 또, 그는 배가 고파도 고고처럼 포조에게 구걸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슬프게도 디디 역시 어느 순간 포조와 럭키 간의 관계에 적응하게 된다. 특히 포조가 럭키 때문에 힘들다며 징징대는 부분에서 디디는 완전히 설득되고 만다.


 외로움을 못 견뎌 조금이라도 더 고고, 디디와 함께 있고 싶어 하면서도 의자에 한 번 앉는 행위에서조차 명분과 체면을 챙기는 포조. 고고와 디디는 능력이 있어 보이는 그에게 맞춰주면서도 포조와 럭키의 정체에 대해 궁금해한다. 하지만 그것도 여유가 있을 때의 이야기. 자신의 욕망과 체면 앞에서는 남의 사정 따위 중요치 않다. 그건 인간다움을 생각하던 디디 역시 마찬가지이다. 고고와 포조가 자신을 놀리는 것에 기분이 나쁜 나머지 럭키와 포조의 의자를 발로 걷어차 버리는 부분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럭키가 왜 짐을 내려놓지 않느냐에 대한 물음에 대해 포조는 그 대답을 회피한다. 돌고 돌아 마침내 포조가 생각해낸 대답은 럭키가 포조에게 버림받을 것을 두려워해 그렇다는 것이다. 진짜 럭키가 그것을 두려워하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럭키의 참혹한 노예 생활이 그에게 강제된 것인지 그가 선택한 것인지는 2부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럭키의 짐. 마비된 자에게 고통은 없다



 무기력과 생각 마비로 가축과 같은 상태가 되어버린 럭키. 그는 가만히 있을 때도 포조의 짐을 내려놓지 않는다. 포조는 그것이 '나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어찌 보면 럭키의 짐은 럭키를 지탱해주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무거워 보이는 가방 안엔 모래가 들었다고 하질 않았던가.


 2부에 들어서 포조는 눈이 멀고 럭키는 목소리를 잃은 채로 등장한다. 눈이 먼 포조는 디디와 고고에게 잠시 의존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디디와 고고는 럭키의 짐이 럭키에게 그리하듯 양쪽에서 포조의 중심을 잡아준다.


 하지만 럭키가 생각을 잃은 것처럼 눈을 잃은 포조는 어느 정도의 정념을 상실했다. 외로움을 느낄 시간조차 인지하지 못하게 된 포조는 다시 정신없이 길을 떠난다. 디디와 고고의 관계처럼, 포조와 럭키는 늘 그래왔듯 서로에게 의지하며 갈 길을 재촉한다. 더 이상 외로움의 시간을 느끼지 못하는 포조의 모습은 1부에서 외로움을 이기지 못해 조금이라도 더 앉아있을 명분을 찾던 그 모습과 대비된다. 아마 그럴 정신이 없는 쪽이 포조에게 더 편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럭키를 보면 알 수 있다. 럭키가 생각을 명령받는 순간 폭주해버렸듯이, 감각을 잃는 편이 오히려 더 평온할지도 모른다. 목소리를 잃어 신음조차 못 내게 된 럭키는 앞을 볼 수 없는 포조의 손에 정성스레 자신을 학대할 채찍과 목줄을 쥐여준다. 침을 흘리고 신음하던 럭키가 목소리를 잃고 나서 더 활기차 보이는 건 왜였을까.




블라디미르의 괴로움. 인간다운 삶에 대하여




 극의 인물 중 가장 괴로워 보이는 것은 역시 블라디미르, 디디이다. 고고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디디는 거의 모든 것을 기억한다. 매일 반복되는 비슷한 나날들을 인식한다. 그는 어제보다 나무가 더 생기있어진 것도 눈치채고, 어제의 포조와 럭키, 그리고 소년을 기억한다.


 시간의 흐름을 느끼지 못하는 자는 슬퍼하지 않는다. 모두 하나 같이 기억상실증에라도 걸린 것처럼 어제의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오로지 디디만이 어제와 내일 사이의 오늘을 자각하는 듯이 보였다. 삶의 시간을 그대로 겪어내기가 너무 힘이 들어 디디는 슬퍼한다. '목을 매달아버릴까?'. 내일은 더 튼튼한 끈을 가져오자며 매일 같은 결심을 반복하는 디디. 그 반복이 힘겹지만 디디는 고도가 온다는 희망과 고고에 대한 애증으로 견뎌낸다.


 어제도, 그저께도, 그 전에도 계속해서 비슷한 일들을 겪어왔기 때문에 우리는 어느새 그것에 무감각해지곤 한다. 비슷한 일을 수없이 겪었을 때 우리의 감각은 그것에 적응하지만, 우리의 사고는 그 반복을 인지하지 못한다. 그것을 인지하지 못한다면 수없이 많은 세월을 겪어도 그 세월에서 얻는 건 없다. 얻는 것이 없으면 성장 또한 없다. 육신은 늙어가지만 매일 같이 무료함을 못 견디고 재밋거리를 찾는 아이의 태도를 간직하는 고고가 그것을 잘 보여주는 건 아닐까. 고고는 적막감에 슬퍼하지만 시간의 연속성을 인지하는 디디는 홀로 늙어감에 슬퍼한다.


 디디는 어제를 기억하지 못하는 고고를 어르고 달래면서도, 실은 누구보다도 더 외로워한다. 디디는 어제와 오늘의 반복과 차이를 인지하고 그 속에서 실낱같은 무엇인가를 얻어내고자 한다. 그 시간을 있는 그대로 견뎌내는 과정은 고통스럽다. 디디는 고고보다도 더 빠르게 늙어가는 것이다. 고고는 하루에도 몇 번씩 그들이 고도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지만, 디디는 단 한 번도 그들이 고도를 기다리고 있다는 그 목적의식을 버리지 않는다. 다들 그들의 시간을 끊임없이 잃어버리며 똑같은 오늘을 반복할 때 디디는 그 속에서 어제를 디딘 오늘을 사는 것이다. 그렇기에 디디는 소년에게, 고도를 보거든 나를 만났다고 전해달라 한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는 조금이라도 진전된 내일을 기약한다.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그 고통을 놓지 않는 것일까? 허무감에 빠지더라도 무감각의 안정감을 버리고 오늘을 간직하고자 하는 것이 더 행복한 삶일까? 인간다움에 대한 추구가 디디만의 몫이라면 그것은 과연 의미가 있는 것인가? 그렇게 당부했는데도 내일 또 다시 소년이 그를 처음 본다고 한다면, 디디의 고뇌는 다시 무의미해지고 말 것이 아닌가? 하지만, 그럼에도 디디의 인간다운 괴로움이 의미있는 것이라고 자신있게 대답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포조의 노예 럭키의 삶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낄 수도, 그를 불쌍히 여기게 될 수도 없게 되고야 말 것이다.

 

 


 


글 - 아트인사이트 에디터 주유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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