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 NEED TO TALK ABOUT KEVIN.
* 본 글은 약간의 스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명작이라고 불릴 정도로 인기가 많은 영화들은 나름대로의 이유를 가지고 있다. <케빈에 대하여>라는 작품도 그렇다. 개봉 이후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정도로 관객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던 영화이다.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을 가지고 있어 잔인하거나 공포스러운 분위기의 영화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나는 혼자 영화를 보는 걸 즐겨 하는데 공포물이나 폭력적인 장르는 피하는 편이다. 그래서 고민을 많이 하다가 보게 되었는데 전체적인 분위기가 어둡긴 하지만 많은 생각을 가지게 해준 영화였다. 그렇지만 결코 가볍게, 킬링타임용으로 볼 수 있는 영화는 아닌 것 같다.
자유로운 영혼의 에바는 케빈의 엄마이다. 결혼하기 전 그녀는 사랑도 열심히 하고 여행도 즐기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자유를 사랑했다.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던 그녀는 남자친구와 여행에서 계획에 없던 아이를 임신하게 된다. 그렇게 에바는 결혼을 하고 아내가 되고, 엄마가 된다. 불러오는 배를 바라보는 에바의 표정에서 복잡한 감정이 드러난다. 아무런 느낌이 없는 무표정같이 보이기도 한다. 출산을 하고 아이를 안고 있는 그녀의 표정도 역시 변함이 없었다. 그녀에게 모성애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이를 사랑하진 않지만 모성애를 가지려고 노력한다. 노력으로 되는 일인지 사실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에바는 케빈을 사랑으로 키우려고 한다. 그러나 육아는 보통 일이 아니었다. 에바는 육아를 경험하면서 육체와 정신이 모두 피폐해져 간다. 아이는 시도 때도 없이 울었다. 언젠가 에바는 피곤에 절여진 듯한 표정을 하고 유모차를 끌고 산책을 나간다. 도심 한복판에서 아이가 울음을 터트리자 에바는 공사장 한가운데로 유모차를 끌고 간다. 도로 공사 소음에 아이 울음소리를 묻어버린다. 그 후 그녀는 깊은 숨을 들이마신다. 그 장면 하나로 육아의 고됨이 와닿았다. 그런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을 안아줄 수 있는 곳은 어디도 없었다.
이러한 에바의 태도를 보았을 때 영화는 사회에, 관객에게 모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케빈은 에바의 아들이었지만 원하지 않는 자식이었다. 에바는 케빈에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모성애의 태도로 접근하지 않는다. 어머니의 위대함과 모성애의 당연함에 대해 반론을 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그냥 여성이었고 평범한 사람이었다.
'익숙한 거랑 좋아하는 거랑은 달라,
엄마는 그냥 내게 익숙한 거야'
케빈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보면 마냥 그를 비난할 수는 없다. 케빈은 당연하게 받을 줄 알았던 어머니의 사랑이 결여된 채 유년기를 보내온다. 그는 점점 더 삐뚤어지고 반항은 강해진다. 그런 행동들이 엄마의 관심을 끌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을 하면 조금은 안타깝기도 하다. 처음엔 에바는 그대로 노력을 하고 있는데 계속 반항하는 케빈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냥 선천적으로 악마처럼 보였다. 동생을 악랄하게 괴롭히고 이유 모를 행동으로 엄마를 계속 힘들게 만든다. 고의였다. 케빈이 왜 그런 행동을 보였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그의 내면을 좀 더 들여다봐야 하지 않을까.
한 평론가는 이 영화를 ‘사랑하지만 사랑하지 않는 척 하는 아들과 사랑하지 않지만 사랑하는 척 하는 엄마’라고 말했다. 이 한 문장으로 영화의 전반적인 내용을 잘 설명했다고 생각한다. 케빈은 엄마의 노력 속에서도 진짜 사랑을 나타내는 무언가를 찾지 못했던 것일까. 에바는 어린 케빈에게 ‘너가 태어나기 전의 삶이 더 좋았어’라고 말하며 한숨을 쉬기도 한다. 그런 에바의 행동과 말투, 표정에서 케빈은 결핍을 느낀 것이다. 아무리 어렸어도 말이다. 그래서 더욱 엄마를 괴롭히고 결국엔 끔찍한 일까지 저지르게 된다. 그리고 끝에 케빈과 에바만 남게 된다. 케빈이 엄마를 진정으로 싫어했더라면 그렇게 세상에 둘만 남겨놓진 않았을 것이다.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은 악마는 선천적인가 후천적인가에 대해 놓고 많은 이야기를 쏟아냈다. 결국엔 살인까지 저지른 케빈은 선천적인 악마인가? 후천적 악마인가. 케빈의 상황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방식은 너무나 끔찍했다. 그의 방식이 조금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케빈을 마냥 후천적인 악마라고 단정 지을 수 없었다.
케빈은 끔찍한 살인을 저지르고 에바는 그 일로 인해 사람들을 피해 다니며 살아간다.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 사실 한명에게 그 책임을 모두 지게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둘 다 피해자가 아닐까. 모성애가 결핍된 엄마와 그것을 갈구하는 아들의 이야기는 많은 메시지를 담고 있지만 아직도 나에겐 어려운 영화이다. WE NEED TO TALK ABOUT KEVIN의 제목처럼 우리는 더 많은 이야기를 해야 한다.
글 - 아트인사이트 에디터 신예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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